챗GPT 시대, 우리 집 의대생들 '종이책' 고집이유

"느린 교육"으로도 살아남기

by Reich 라이히

1. 만화 속 상상이 현실이 된 2026년

​식당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면 생경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태블릿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고, 부모님들은 그 틈을 타 서둘러 식사를 마칩니다.

불과 십여 년 전, 내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블루라이트 뿜어내는 액정이 아니라, 모서리가 닳아버린 종이책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문득 저만 다른 시대에 남겨진 외계인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책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책과 친했던 꼬질이들의 유아기


​사실 2026년의 이 풍경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 보던 학습 만화 마지막 장에는 "와, 나중에는 모두가 스마트폰을 쓴대!"라는 대목이 있었고, 그때 저는 그저 먼 미래의 '공상' 정도로 치부하며 혼자 생각하곤 했습니다. "설마 저게 진짜 되겠어?"


하지만 상상은 너무나 빨리 현실을 추월해 버렸습니다. 이제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책'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너무나 빠르며,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2. '느린 교육'이 구식이 되어버린 시대

​아이들을 키울 때 저는 이른바 '느린 교육'을 고집했습니다. 독일에서 배운 이 방식의 핵심은 '기다림''논리'였습니다. 궁금한 것이 생겨도 바로 검색창을 켜지 않게 했습니다. 대신 두꺼운 백과사전을 찾아 보도록 하고, 그림책의 다음 장면을 스스로 상상하며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조절하게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당히 느리고 답답한 방식이었습니다. (아. 제가 생각해도 답답한 꼬질맘 입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주도성을 되찾는 일이며, 각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여 삶의 본질적인 깊이를 맛보는 것이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느린 속도'를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

- 카를 오노레,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In Praise of Slowness)≫


​하지만 지금은 1초 만에 검색 결과가 쏟아지고, 알고리즘이 아이의 취향을 분석해 다음 영상을 대령하는 시대입니다. 이 알고리즘이 우리들보다 우리들의 아이들을 더욱더 잘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18년 넘게 독일 기업의 리더로 일하며 변화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자부했음에도, 가끔은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하나의 문장을 곱씹는 법"이 이 초연결 사회에서는 효율성 떨어지는 구식 엔진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자주 스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 유물이라 불려도 좋은, 변하지 않는 뿌리

​그러나 저의 걱정은 어쩌면 기우였습니다.

​이 답답한 교육을 받고 자란 저의 꼬질이 의대생 두 아이의 예를 들자면, ( 그리고 그 친구들의 이야기들까지 더하여) 의학 논문을 제미나이나 챗GPT로 찾으면 금방일 텐데도, 여전히 시간 여유가 있을 때면 종이책을 들고 소파에 깊숙이 기댑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튕기는 속도보다, 스크롤을 휙휙 내리는 순간들보다, 직접 종이를 넘기며 문장을 씹어 삼키는 그 느릿한 행위가 주는 무게를 아이들은 이미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면을 끄고 선택한 두꺼운 종이책의 무게, 그 속에서 자라난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

​스마트폰이 모든 답을 알려주는 시대일수록, 스스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힘은 역설적으로 그 '느릿함' 속에서 길러졌습니다. 화려한 영상이 시각을 마비시킬 때, 아이들이 글자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내던 7년의 훈련이 지금의 '공부의 힘'을 만들었음을 저는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낸 시간이 유물처럼 느껴질지언정, 그 유물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아이들의 내면을 지탱하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깊이 읽기는 인간의 뇌가 디지털 매체에서 얻는 '수박 겉핥기 식'의 빠른 정보 처리와는 전혀 다른, 유추와 연역, 비판적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경망을 만든다." ​-

메리언 울프, ≪책 읽는 뇌(Proust and the Squid)≫


4. 변화의 파도 위에서 중심 잡기


​세상은 앞으로 더 빠르게 변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50여 년보다, 아이들이 마주할 앞으로의 10년이 더 극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도구는 변해도 본질은 남으니까요.

결국 남는 것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였습니다.

​손에 든 것이 스마트폰이든 태블릿이든, 그 너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아픔을 읽어낼 줄 아는 '독일식 원칙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식당 테이블 위, 태블릿에 열중한 아이들을 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삼킵니다.


"얘들아, 가끔은 화면을 잠시 내려놓고 종이책의 냄새를 느껴보렴. 세상의 속도를 이기는 힘은, 가끔은 조금 느린 곳에도 충분히 스며 있단다."


세상의 속도를 이기는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느린 뿌리'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브런치라는 낯선 공간에서 첫걸음을 떼다 보니, 이 브런치북 목차에 미처 남아내지 못한 제1화부터 7화까지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 이 북에 넣는 방법을 아직도 못찾았습니다... ) 작가의 프로필 글 목록에서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서툰 시작의 기록들에도 따뜻한 관심 부탁드리며, 다음 회에서는 좀 더 핵심내용으로 찾아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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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보폭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은 분들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라이킷 과 구독으로 마음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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