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아기 취급’하는 순간, 이미 늦습니다

독일 Kita에서 처음 배운, 아이를 대하는 방식

by Reich 라이히

기저귀 찬 여덟 달, 독일에서 마주한 낯선 존중

독일의 어린이집(Kita)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제가 목격한 광경은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그곳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호받아야 할 아기'가 없었습니다. 대신 아주 작고 미숙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한 명의 인격체'들만이 존재했습니다.

​“너도 보이지 않니? 선생님이 지금 다른 친구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잖아? 조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길 바래.”

몇개 단어도 떼지 못한 채 축축한 기저귀 때문에 울음이 터진 여덟 달 된 아기에게, 선생님은 차분하게 눈을 맞추며 말을 건넸습니다. 저런 독일어의 뜻은 커녕 그 문장의 뉘앙스조차 아이가 알아듣기나 할까 싶었지만 선생님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습니다. 그것은 지시가 아니라 '양해'였고, 훈육이 아니라 '설명'이었습니다.


아이를 작게 보면, 결코 크게 키울 수 없습니다.

장난감을 두고 다투는 돌쟁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도 서늘할 만큼 명확했습니다.

“누가 먼저 양보하고 기다려 볼까? 혹은 누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래?”

​당연히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 뒤로 넘어가며 울음을 터뜨렸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가차 없이 장난감을 들어 아이들의 눈은 닿지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선반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둘 다 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없겠구나.”

​아이의 눈앞에서 장난감이 사라지는 순간, 어떠한 타협도 울음도 통하지 않는 단호한 질서를 보았습니다. 처음엔 ‘애들한테 너무 박한 것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릿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보였습니다. 1세에서 3세 사이의 아이들이 모인 그 교실에 기이할 정도의 ‘조용한 질서’가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배우고 있었습니다. 나의 욕구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서우면 돌아 내려오렴" – 공포를 존중받는 법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것은 큰아이가 두 살 무렵, 유치원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는 색색의 계단을 줄 서서 잘 올라갔지만, 막상 미끄럼틀 꼭대기에 서면 공포에 질려 얼어붙곤 했습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를 보며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한국 같았으면 "남자애가 씩씩해야지!", "엄마가 밑에서 받아줄게, 한 번만 타보자"라며 등의 리엑션이 나왔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이의 눈을 맞추며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아직 두려운 거니? 그럼 그냥 돌아 내려오렴.”

아이가 뒤를 돌아 내려오기 시작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또래 아이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불평 없이 줄줄이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뒷모습들을 보며 저는 묘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선생님께 여쭤보니 돌아온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오히려 위험을 인지하는 지능이 높다는 증거예요. 이 미끄럼틀 높이는 아이 눈에는 충분히 높고, 겁이 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는 그저 기다려주면 돼요.”

​그들은 아이의 공포를 ‘나약함’으로 치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는 ‘지능’으로, 그리고 멈출 줄 아는 ‘용기’로 해석해 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억지로 밀어 내려보냈다면 아이는 미끄럼틀을 타는 법은 배웠겠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보내는 경고 신호를 무시하는 법도 함께 배웠을 것입니다.

"무서우면 돌아 내려와도 괜찮아."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겁에 질린 아이와 그 눈을 맞추며 '후퇴'할 자유를 허용하는 독일 선생님"

​"아이를 돕는 것은 아이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 마리아 몬테소리 (Maria Montessori)


독일에서 배운 이 낯설고도 단단한 '존중'의 철학은 저의 육아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전혀 다른 교육 현장에 발을 딛는 순간, 이 철학은 거대한 벽에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정말 기다려주는 게 정답일까?"


독일에서 배운 방식은 분명 옳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제 아이를 무너뜨렸을까요.

같은 방법인데,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차이를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독일식 원칙이 한국의 현실과 충돌할 때 제가 내린 '결정적인 선택 '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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