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가격 담합을 하면 어떡하나요?" (1부)

TV가 없는 집, 2주마다 찾아오던 설렘

by Reich 라이히

TV를 없는 집, 그 자리를 채운 활자의 바다

​저희 집에는 TV가 없었습니다. 대신 거대한 테이블과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그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죠. 아이들이 글을 모를 때는 목이 쉴 때까지 책을 읽어주었고, 일곱 살 무렵 스스로 글눈이 트이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활자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일곱 살부터 여덟 살 사이, 그 짧은 1~2년 동안 아이들이 읽어치운 책만 해도 아마 수천 권은 족히 될 것입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강남 YMCA 어린이 서점의 ‘1등 고객’이었습니다. 거의 2주에 한 번씩 새로운 전집 세트가 현관 앞에 배달되는 날은 우리 집만의 작은 축제일이었지요. 위인전, 한국사, 세계사부터 사회와 경제까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그림책과 만화책을 종류 가리지 않고 섭식하듯 읽었습니다. 오죽하면 젊은 서점 주인분이 “우리 애들도 이사님댁 아이들처럼 책을 좋아하면 원이 없겠어요. 어떻게 이렇게 책을 좋아하죠? ”라며 부러움 섞인 하소연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집에 TV 나 게임기 등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나.. 뒤늦게 추측하는 중입니다)

"우와, 새 책이다!" & 책으로 물든 거실, '엎드려 읽기'의 삼매경


7세에 만난 수천 권의 책, 지식의 지도를 그리다

​그렇게 무작위로 흡수한 지식은 아이의 머릿속에서 자기들끼리 연결되며 ‘생각의 힘’으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 저력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폭발했던 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사회 시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날 키가 크고 지적이셨던 남자 선생님은 시장 경제의 원리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자, 왜 똑같은 가게들이 여러 개 필요할까? A와 B 가게가 서로 경쟁을 해야 가격이 낮아지고, 그래야 우리 소비자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란다.”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지던 그때였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맹랑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A랑 B랑 서로 짜고 가격을 안 내리는 ‘가격 담합’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어떡해요?”

수천 권의 책이 아이의 입을 통해 살아있는 지식이 되던 순간


예습 없이도 선생님을 놀라게 한 배경지식의 힘

​교실에는 순간 정적이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입에서 ‘가격 담합’이라는 전문 용어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이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물으셨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공부할 내용을 혹시 집에서 미리 예습하고 온 거니?”

초2가 예습을 하다니요? 그저 며칠 전 거실 바닥에 뒹굴거리며 읽었던 경제 만화 속 에피소드가 선생님의 설명과 만나는 순간, 머릿속에서 스파크가 튄 것뿐이었죠.

​그날 퇴근한 저에게 상기된 목소리로 학교 사회시간을 전하던, 아이의 눈에서 반짝이던 자신감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 역시 아이가 경제 만화책을 통해 그 어려운 의미와 단어들을 스스로 학습했다는 사실에 내심 많이 놀라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학생이 아니라, 이미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선생님과 ‘토론’하는 주체가 된 순간. 수천 권의 책이 아이의 입을 통해 살아있는 지식으로 증명되던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전부다."

— 장 피아제 (Jean Piaget), 발달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윌링햄은 "지식은 새로운 지식을 붙잡는 갈고리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7살부터 쌓아온 수천 권의 '독서 갈고리'가 있었기에, 아이는 학교 수업을 수동적으로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믿는 진짜 공부의 힘입니다.


​다음 화, 4월 28일 (화)에 "선생님, 가격 담합을 하면 어떡하나요?" (2부)/ 국어 학원 없이 의대에 합격한 '독서 근육'의 비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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