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공부>를 읽고
독서 기록을 써본 지가 심각하게 오래되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나는 다른 매거진을 열어 '딴짓하는 인생 공부'를 연재 중이다. 이제 막 시작해서 두 편 뿐이지만, 앞으로도 천천히, 얇고 길게, 내가 살아오던 방식대로 매주 한두 편씩 꾸준히 올려볼 생각이다. 나의 인생 공부에 왜 '딴짓'이라는 제목을 덧붙였느냐면, 나는 지금 그야말로 딴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28살에 4년 동안 잘 쌓아오던 경력을 잠시 끊고 캐나다에 왔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은 영어 공부와 독서 그리고 글쓰기뿐이다. 인생에 이렇게 즐겁고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본 적이 있나 싶다. 소중하게 시간을 사유하고 있고, 그만큼 내 인생에 값어치를 하고 있다.
<최재천의 공부>, 이 책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와 더불어 앞으로 1년간의 삶의 기둥을 만들게 해 책이나 다름없다. 나름 하루하루 충실히 살고 있고 인생의 경력도 한 줄 한 줄 보기 좋게 쌓아가고 있어도, 무엇인가 인생 한편에 자꾸 거슬리는 공허가 남는다면, 꼭 이 두 권을 책을 추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독서 기록도 위의 두 책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의 목차는 공부의 뿌리/ 공부의 시간/ 공부의 양분/ 공부의 성장/ 공부의 변화/ 공부의 활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루하게 왜 목차 얘기로 시작했느냐 하면, 책을 읽을 땐 목차를 분명히 인지해야 머릿속에 마치 책장처럼 옳은 위치에 책의 내용을 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 이유를 넘어서, 공부라는 제목과 목차를 가지고 인생의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흐름이 너무나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인생의 뿌리/ 인생의 시간/ 인생의 양분/ 인생의 성장/ 인생의 변화를 다룬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최재천 교수의 대답에 더해져 이해에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안희경 작가의 말이 눈에 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어떤 공부를 해왔을까? 되짚어보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딴짓을 많이 했다. 교과 점수는 고작 평균이나 하는 내가 두 시간씩 걸려서 연세대학교의 생명과학 과정을 듣고 다니기도 하고, 한국 모의 유네스코 총회에 참가해서 전국 곳곳에서 모인 100여 명을 앞에 두고 발표하기도 했다. 경험은 많았지만, 아쉽게도 그 경험이 제대로 모여 열매를 이뤄내진 못했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교과 과정을 마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제까지 나는 어떤 공부를 해왔는가 회의감이 든다. 원하는 직업으로 학과를 결정하고 해당 학과에서 필요한 필수 교육을 받으며, 이 정도는 환자를 대할 때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하는 지식이니 달달 외우고 시험을 보고, 필요에 의한 공부만을 해 오지 않았나. 나는 이제까지 '몇 살에는 얼마를 모았으면 좋겠으니 수입의 몇 퍼센트를 저축하기 위해 돈 관리 공부를 해야지', '취업에 도움이 되니 토익 공부를 해야지'라는 등의 목표를 위한 삶을 살았다. 30살이면 1억을 모을 거라 다짐했고, 정작 취업을 하고 목표 금액에 가까워지는 통장 잔액을 보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다들 이렇게만 사는 걸까? 너무 싫은데.'
그런 와중의 코로나 19에 직면하고 응급실에서 응급구조사로 근무하던 나 또한 여느 의료종사자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대체 근무에 나서야 했다. 당일에도 바뀌는 근무 스케줄에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다들 자신이 격리 대상자가 되면 근무를 메꿔줄 동료들이 힘들어지는 것을 아니까 자연스럽게 외출과 약속을 줄여갔다. 하지만 '대체 근무'라는 것을 계속하다 보니 상당히 묘한 생각이 들었다. 24시간을 여는 응급실 특성상 누군가 격리당해서 인력은 축소한다고 해도 응급실은 운영 된다. 어떻게든 근무 일정을 바꿔서 일정 최소 인원만 충족이 된다면 응급실은 프로세스가 돌아간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결국 나라는 존재가 나사 하나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고, 내가 이곳에서 쌓아둔 것은 아무런 영향을 남기지 않는 그런 작은 존재 말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내 생각을 뒷받침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바라보고 향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쯤 캐나다로 왔다(당시 집에서는 휴식을 취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무작정 변명을 대고 떠나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고 캐나다에서 새로운 사람도 만나보고 캐나다의 분위기도 구경하며 조금씩 무기력함을 벗겨나갔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표지에 이끌려서 사놓고는 집중도 못 하고, 몇 장 억지로 읽고, 멋있는 몇 문장 발견하고 적어두곤 자아도취 하는 그런 독서 말고, '내가 이 책의 이 내용을 읽으며 공허한 나의 인생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느냐'라는 물음을 안고 접근했다. 아무리 좋은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기둥이 튼튼하게 자리 잡혀 있지 않으면 금방 흔들리기 쉬워진다. 내가 1년을 소모해 보고자 결정하고 마음을 비우다가 이 과정이 인생을 삶에 있어서 '가도 되는 길인지 아닌지를' 따지며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할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이 배우고 훈련받을 곳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지금, 결국 책밖에 없어요. 취미 독서는 아예 깨끗이 잊으세요. 독서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응급실에서 잘 적응해서 일하고 있다고 얘기하면 손이 빠르다고만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아주 느린 사람이다. 반응도 느리고, 변화에 따라가는 것도 느리다. 그래서 지금처럼 이렇게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선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느린 사람인 대신에 한 번 체계적으로 생각을 거쳐 머릿속에 입력이 되면 출력을 잘한다. 그래서 '책으로 꾸준히 지식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 변화되는 세상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라는 뉘앙스의 문장을 봤을 때 반가웠다. 대신 앞으로는 좀 더 전투적으로, 나를 길러내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젊은 친구들,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어차피 조금은 엉성한 구조로 가는 게 낫다. 이런 것에 덤벼들고 저런 것에 덤벼들면, 이쪽은 엉성해도 저쪽에서 깊게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쪽과 저쪽이 얼추 만나더라.'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악착같이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고속도로 같은 길이 눈앞에 보입니다. '이거다!' 싶으면 그때 전력으로 내달리면 됩니다. 제가 정확하게 그렇게 했어요. 한 10년쯤 달리다 보니 처음에는 친구들보다 훨씬 늦었는데, 10년 정도 지나면서 남들보다 조금씩 앞서가고 있더라고요.
1년간의 휴식을 결정하고 캐나다에서 지내며 '아무래도 나는 지름길을 찾는 성격은 못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주야장천 풀타임 근무를 몇 개씩 해서 몇천을 모아간다는데 나는 그만큼을 써가면서 책벌레가 되어 가고 있다. 이 기간이 내 인생에서 버린 시간이 될지, 가치 있는 시간이 될지는 미래의 나만이 알 수 있겠지만, 이미 나는 이 기간이 나에게 가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끝으로, 이 책은 전반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속해라, 계속 나아가라. 딴짓도 해보고, 몰입도 해보고, 쓸모없는 물음도 던져보고 일단 해라. 부모에게서도 듣기 힘든 함축된 응원의 편지, 몇 년 치를 한꺼번에 읽은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지금 인생에 한 번뿐일 지도 모를 대단히 큰 딴짓을 계속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