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Little Forest: Four Seasons), 2017>
IMDb rating: 7.6/10
감독: Jun'ichi Mori
출연: Ai Hashimoto, Mayu Matsuoka, Yôichi Nukumizu
미국에서 자연의학 박사 학위 과정을 함께 밟았던 동료들 중에는 이른바 '허브 덕후'들이 많았습니다. 약초학(Herbology)은 자연의학의 중심축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허브와 그것을 길러낸 대지에 대한 그들의 격한 경외와 애정은 처음엔 문외한이었던 저에게 솔직히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허브 하나하나에 수천년에 걸쳐 쌓여온 그들만의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열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허브 덕후들이 또 하나 사랑했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이아(Gaia)'입니다. 그들이 만든 클럽 이름에도, 이메일 아이디에도, 새로 오픈한 클리닉 이름에도 어김없이 '가이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으로 불리지만, 단순히 땅만을 관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과 질서가 태어나는 바탕, 인간과 신, 식물과 동물,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품는 원초적 어머니입니다. 가이아는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구원하거나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존재들이 돌아왔을 때, 언제든 몸을 맡길 수 있는 자리를 흔들림 없이 내어줍니다. 말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에는 '음식' 이야기 말고도 또 하나의 큰 서사가 흐릅니다. 바로 '대지'입니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치코에게, 대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그녀의 삶을 이끌어 주는 또 하나의 주인공입니다. 대지가 건네는 치유는 극적이지 않습니다. 그저 계절이 돌아오듯, 조용히 스며듭니다.
이 영화에서 '음식'과 '대지'는 더 깊은 층위에서 하나의 원형으로 연결됩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고향 땅에서 자란 재료로, 어머니가 남긴 레시피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만드는 음식. 그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스며 있는 동시에, 대지가 건네준 생명의 조각이기도 합니다. 이치코가 돌아간 곳은 단순한 고향 마을이 아니라,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를 감싸 안는 "어머니 대지(Motherland)"였습니다. 바로 가이아적 세계관과 맞닿은 공간입니다.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의 주인공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우주에서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던 중 사고를 당해 우주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합니다. 한때 삶의 의지를 잃었던 그녀는 다시 살아가려는 선택을 하고, 수차례의 절체절명의 순간 끝에 마침내 지구로 귀환합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관람할 경우 “실제 우주를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는 극찬을 받았고, 특히 영화 초반 약 10여 분간 이어지는 무중력 롱테이크는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한 시퀀스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강하게 남은 장면은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지구에 도착하는 라스트 신입니다. 그녀가 땅에 엎드려 미소를 지으며 흙을 움켜쥐는 순간. 그리고 엄청나게 느껴졌을 중력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맨발로 대지 위에 우뚝 서는 그 이미지입니다. 그녀는 비로소 땅에 발을 디딘 뒤에야, 아니 맨발이 흙속으로 뿌리를 내린 그 순간에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무렇지 않게 땅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 대지가 언제나 우리를 지탱해 왔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잊고 지냅니다. 이치코처럼, 스톤 박사처럼, 그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을 마주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가 서 있던 땅도, 먹어 온 음식도, 지나온 계절들도, 말없이 우리를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가이아는 신화 속의 먼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 대지이자 자연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각은 언제나 형언하기 어려운 위안을 건네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