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놀자"
“야 우리 집에 가서 놀래?”
내가 어릴 때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흙먼지 마시면서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어느덧 처음 보는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두꺼비집을 만들곤 했다.
오지랖이 넓던 나는, 툭하면 혼자 놀고 있던 친구들이나 다른 무리들의 친구들에게 같이 놀자 했었고, 시간이 지나면 배고프지 않냐면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이기 일쑤였다.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질질 끌면서 우리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손톱 아래 떼가 가득 차있는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가리키며 이곳은 뭐하는 곳이고 여기는 누가 살고 있는지 친구들에게 알려주었다.
이러한 말썽꾸러기 아들 탓에, 어머니는 항상 집안에 아이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음식들을 쟁여 놓으셨고 두 손은 매일 바쁘게 움직이셔야 했다.
그래도 어머님은 늦둥이 아들이 귀엽게 느껴지셨는지 단 한 번도 꾸지람하지 않으셨고 항상 넘치는 음식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배부르게 하셨다.
해가지기 전에 친구들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근처 비디오 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비디오를 빌린다는 기분에 들뜨기도 했지만, 내일 집에 올 친구들과 함께 즐길 게 생긴다는 것이 나를 더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은 한 계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는데, 너무 익숙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는지 부모님은 내게 곧 이사를 가야한다 하셨다.
이사가 길게 가는 소풍인 줄 알고 좋아하던 나였지만, 후에 이사의 진짜 뜻을 알게 됐던 그날의 나는 정말 무척이나 울었다.
식탐이 넘쳐 아버지 퇴근하시기 전에 저녁을 먹고 기다리다, 귀가하신 아버지께서 식사하실 때 아무 말 않고 몰래 한 끼를 더 먹던 나였는데, 이사 간다는 말에 어찌나 서러웠던지 배고픔을 꾹꾹 참아가며 일인시위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말썽꾸러기 아들이 배가고파 힘들어하진 않을까 걱정하신 어머님께서, 약을 먹으려면 밥을 두 번이나 먹어야 한다고 하시며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먹이시는 것처럼 분위기를 맞춰주시어 내 단식투쟁은 하루를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생에 첫 반항의 날은 친구들을 두고 떠나는 이삿날이 되었다.
아버지 차 뒷좌석에 실려 따라오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대성통곡을 했지만 두발을 내릴 수 있던 곳은 부모님이 계획하신 새 보금자리였다.
전학 갔던 곳에서 처음 뵙는 선생님들과 날 궁금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앞에 놓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처음으로 ‘어색한 자기소개’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이사 간 동네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항상 아쉬울 때쯤 기나긴 방학이었다.
방학이 되면 예전 살던 동네에 놀러 가 ‘동네 친구들’을 보며 헤어졌던 아쉬움을 잠시나마 달래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턴 방학이 기다려지기보다 전학 간 동네의 학기가 계속 되길 바란 적도 있었다.
어느새 교복을 입고 학원과 과외를 하며, 사춘기라는 어설픈 반항기를 거쳐, 모두의 관심과 걱정 속에 수능을 겪고 보니 대학이란 곳에서 어색하게 성인의 흉내를 내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 삶에 고민할 틈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나라를 위한 국방의 의무였고, 질겼지만 쏜살같은 복무의 시간이 지나 떠밀리듯 졸업을 거치니, 어느덧 나는 지금의 내가 돼 있었다.
많이 성숙했고 또 성장해 있었다.
진중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고 있었고 또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합리적 소비를 지향하고 무슨 일이든 이성을 앞세워 기회비용을 판단하려는 나의 모습이 현명히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기며 현실에 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뒤를 보지 못하고 살아오다, 무심코 마주쳤던 나의 어릴 적 사진들은 내 마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추억에 미소 짓고 빠져있던 나를 발견했던 그때, 내 자신이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사진을 들고 있던 난, 더는 ‘사랑 가득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마음보단 생각이 앞서 사람에게 말을 걸기에도 조금은 망설여졌고,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무언 갈 받는 상황이 온다면 숨겨져 있는 속마음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또,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기 전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두 손을 뒤로 감추는 겁쟁이로 변해있던 나를 발견하곤 기분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방어행동들은 과거에 느낀 상처들에서 배운 것들로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편견을 머릿속에 주입시키고, ‘이런 사람은 이럴 것이야.’하는 순수하지 못한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두꺼비집을 만들지도, 낯선 사람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내가 아끼는 것을 그 사람에게 선뜻 안겨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들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지도, 내일은 더 즐거울 거란 기대 역시 하지 않게 됐다.
사진첩의 끝자락에 와서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사진 속 그대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들도 나와 같이 변했다면 삶이 참 속상할 텐데, 차라리 변한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내가 지금 처음 보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때처럼 같이 놀자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다들 거절할 것만 같은데, 그것이 요즘 세상이 위험해서인지, 그들이 보기에 내가 위험해선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삶은 성장에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다 성숙 때 많은 상처를 내는 작업인가?
모자란 현명에 답이 보이지 않는 방황을 하다, 스치는 생각에 눈에 힘이 들어간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웃음소리를 언제 들었었지?’
멍한 생각에 표정이 굳어지다, 변함없는 것은 맑게 떠있는 구름 하나라는 사실에 마음에 멀미가 울렁인다.
이전보다 강하게 눌려지는 묵직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