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이곳에선 선거로 구성된 합법적 의회가 스스로 민주주의의 숨통을 끊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후 1932년 총선에서 37.4%의 득표율로 제1당에 오른 히틀러의 나치당은 이듬해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의회의 입법권을 내각에 통째로 헌납한 이들은 다름 아닌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원들이었다. 이에 대중은 열광했고, 의회는 화답했으며, 공화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 합법적으로 붕괴했다.
만일 이 뼈아픈 역사가 불편하게 다가온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이들에게 바이마르의 최후는 설명하기 껄끄러운 치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의 정곡에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가장 흔하고 위험한 착각은 그것을 '다수결'과 같은 말로 여기는 태도다. 다수가 원하면 옳고, 다수의 선택은 무조건 정당하다는 직관적 맹신. 하지만, 이 얄팍한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갈 경우,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완벽한 구현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다수가 원한 결과였으니까.
따라서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옹호하려는 사람이라면 다수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도구는 헌정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견제 장치와 맞물려 돌아갈 때만 정상 작동한다. 그런데 만약 세 축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중우정치로 타락하거나 독재로 향하는 합법적 통로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대중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것은 곧 엘리트주의나 현인 통치(Epistocracy)에 대한 갈망이 아니냐는 반발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부분은 대중이 소수 엘리트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오만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대중의 판단이 '구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뼈저리게 직시하자는 뜻이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지적처럼, 인간의 인지 체계는 빠르고 직관적인 시스템과 느리고 분석적인 시스템으로 나뉜다. 불행히도 정치적 선택의 대다수는 전자. 즉 감정과 본능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진영 논리에 따른 소속감, 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애증, 위협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가 그것이다. 숙의는 비용과 인내가 수월찮게 드는 고단한 과정이지만, 즉각적인 반응은 도파민처럼 빠르고 짜릿한 보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은 이 취약점을 극대화한다. 사용자 참여를 쥐어짜 내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분노와 공포만큼 가성비 좋은 연료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아수라장 속에서 형성된 대중의 여론이 차분한 숙의의 결과물일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그래서 대중이 항상 '틀린다'기보다는 인간의 판단 능력이 굴절되기 쉬운 환경을 현대 정치가 체계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렇다면 보수는, 그리고 제도를 지켜내려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 득세하는 트럼프나 보우소나루 같은 우파 포퓰리즘의 문법은 얄팍하기 짝이 없다. 대중의 분노를 긁어주고, 훼방꾼 엘리트를 악마화하며, 자신을 민의의 유일한 대변자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들은 단기적인 선거 공학으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이것은 결코 보수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에드먼드 버크가 영국 의회에서 갈파했듯, 의원은 선거구민의 심부름꾼(대리인)이 아니라 독립적 판단을 내리는 대표자여야 한다. 보수주의의 본질은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에 대한 깊은 겸손에 있다. 사실 사회란 건 몇몇 설계자의 오만한 청사진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랜 세월 버텨온 기존 제도와 관행 속에는 당대의 이성이 다 헤아리지 못하는 축적된 지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중의 즉각적인 분노에 편승해 제도를 섣불리 허무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보수의 탈을 쓴 급진주의적 선동일 뿐이다. 사실상 기성 질서를 파괴하는 에너지의 방향이 좌파냐, 우파냐만 바뀌었을 뿐, 그 구조적 해악은 동일하다.
그래서 제도보전주의가 내놓는 해답은 명확하다. 대중의 요구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날것의 감정을 '숙의의 용광로'에 통과시켜 정제하자는 것. 즉각적인 혐오에서 비롯된 요구와,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 상태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해 낸 결론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끓어오르는 여론에 비판 없이 영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여론을 벼려낼 제도의 거푸집을 단단히 설계하는 것. 그것이 공화국의 진짜 책무이지 않겠는가.
다수결은 맹신할 신앙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도구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비극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교훈은 다수결 자체를 폐기하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수결이라는 칼날이 공화국의 심장을 찌르지 못하도록 제도의 칼집을 어떻게 짤 것인가. 이 묵직한 고민의 최전선에 바로 보수주의의 본령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