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보전주의는 왜 좌파로 오독되는가

by Edward Alistair Langford

제도보전주의가 한국에서 종종 좌파로 오해받는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면 자못 명백해 보인다. 복지 확대를 지지하고,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비판하며, 기본소득 논의에 열려 있고, ‘비지배 자유’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한국 정치의 낡은 진영 논리에 비추어 보면, 이런 의제들은 영락없는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이 글은 바로 그 얄팍한 오해의 구조를 해체하려는 시도다.


오해의 근원은 한국 정치 특유의 앙상한 이념 기준에 있다. 한국에서 좌우를 가르는 잣대는 대체로 두 가지뿐이다. ‘복지냐 성장이냐’, ‘시장 규제냐 완화냐’를 묻는 정책적 기준과, ‘민주당이냐 국민의힘이냐’를 묻는 소속 진영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 납작한 기준표 안에서는 복지를 지지하고 재벌을 비판하면 곧장 좌파로 분류된다. 그렇기에 제도보전주의가 좌파의 외피를 쓴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념을 재단하는 한국 사회의 그물이 지나치게 성기고 비좁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진정한 이념의 척도란 ‘어떤 정책을 주장하는가’라는 결과물보다,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방법론의 층위에서 제도보전주의는 뼈대부터 명백한 보수. 즉 우파다.


이 사상의 뿌리는 에드먼드 버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의 제도와 관행은 무수한 세대의 시행착오가 누적된 지혜의 산물이므로, 이를 급진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치명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고 버크는 봤다. 따라서 버크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되 그 속도는 점진적이어야 하고, 인위적인 사회 설계보다는 역사적 진화를, 혁명적 전복보다는 제도의 수리를 신뢰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주의의 가장 정통한 핵심이며, 제도보전주의가 딛고 서 있는 사상적 근간이다.


여기서 당연한 반론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복지 확대와 재벌 비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겉으로 드러난 정책과 그 정책을 추동하는 철학적 이유를 혼동한 결과라고 본다. 복지 확대를 지지하는 논리는 두 갈래다. 평등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좌파적 논리라면, 경제적 결핍이 타인의 자의적 지배를 불러오므로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을 보장해야만 개인의 진정한 ‘자유’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제도보전주의의 논리다. 사실상 결론은 같을지언정, 도달하는 경로와 철학적 지향점은 전혀 다르다는 소리다.


재벌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보전주의가 재벌을 비판하는 이유는 시장 경제 자체를 불신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재벌 체제가 시장의 자연스러운 진화 결과가 아니라, 과거의 권력과 편의적 제도가 결합해 만들어낸 인위적 ‘왜곡’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과 공정한 경쟁 구조를 복원하기 위한 제도적 전제 조건을 요구하는 철저히 자유주의적이고 우파적인 접근이라 보는 것이 맞겠다.


또한 필립 페팃이 주창한 ‘비지배 자유’ 개념도 궤를 같이한다. 타인이 나를 임의로 지배할 가능성 자체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자유의 핵심으로 보는 이 개념은, 집단주의나 국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끊임없이 견제해 온 공화주의적 전통의 산물이며, 이 전통은 결코 좌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컨대, 제도보전주의가 좌파로 오독되는 데는 세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겠다.


첫째. 한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공백. 한국의 주류 보수 진영은 그동안 복지를 축소하고, 기득권을 감싸며, 절차적 정당성보다 결과주의에 매몰된 채 성장해 왔다. 이 기형적인 빈자리를 제도보전주의가 채우다 보니, 역설적으로 ‘진짜 보수’의 언어가 진보의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제도보전주의가 좌파라는 증거가 아니라, 한국의 보수가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를 실천해 본 적이 없다는 방증이다.


둘째. 특정 정책 하나로 이념 전체를 재단하는 낡은 관행. 독일 기독교민주당 같은 유럽의 정통 보수 정당들도 당연하게 복지 국가를 지지하고 시장 규제를 수용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좌파라 부르지 않는다. 정책의 파편이 이념의 총체를 결정짓지 않는다.


셋째. ‘변화’를 곧 ‘진보’와 동의어로 여기는 맹목적인 착각이다. 보수주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와 방식을 까다롭게 통제할 뿐이다. 기존 제도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선을 지향하는 것은 가장 전형적인 보수주의의 태도다.


그리하여 내가 하고픈 말은 이렇다. 어떤 한 이념의 정체성은 어떤 표어를 들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왜’ 지지하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 그리하여 제도보전주의는 급진적 단절 대신 점진적 수정을, 혁명의 열정 대신 진화의 지혜를, 설계자의 오만한 이성 대신 시간의 묵묵한 검증을 신뢰한다. 따라서 이 명증한 사상적 방법론 앞에서, 제도보전주의는 논박할 여지 없는 보수주의이자 우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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