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은 하되, 대안은 없는 사람들에게

by Edward Alistair Langford
sddefault.jpg


사회 문제를 논하다 보면 꼭 이런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되곤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떠한 정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꺼내면, 그 즉시 "그걸 할 돈이 어딨어?", "한국에서 그게 되겠어?", "우리 현실이랑은 안 맞아"라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처음엔 현실적인 지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재정 문제나 제도적 맥락을 짚는 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들은 어떤 제안을 내놓아도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구체적인 반박은 없고, 대안도 없고, 그냥 "안 된다"만 있다.


그런데 이건 사실상 비판이 아니라 그냥 거부다.


비판이란 본래 어떤 주장의 약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넘어서는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 방안은 재원 조달 구조가 불분명하니 이런 방식으로 보완해야 한다"든가, "한국의 제도적 맥락에선 이 부분이 충돌하니 이렇게 조정해야 한다"라는 식의 말이 비판의 좋은 예시다. 반면 "그게 되겠어?"라는 그냥 냉소에 가깝다. 냉소는 지적처럼 생겼지만 사실 아무런 인식론적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길을 잃은 사람에게 "이쪽 길은 막혔어"라고만 반복하면서 다른 길은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게 전부라면 그 사람은 길을 안내한 게 아니라 그냥 앞을 막아선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태도가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이 사람들은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이상주의적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에게 순진하다고 조롱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계속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인식론적 기생이다. 남이 고민해서 꺼낸 논의를 재료 삼아 자신의 냉소를 세련되게 포장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이 사회 문제를 언급하는 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불만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또한 변화에 대한 의지는 없으면서 불평할 권리는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 심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심리를 정치적 참여나 비판적 사유로 착각해선 안 된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현실적인 제약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지 않냐"라는 말이다. 맞다. 하지만 그 지적이 의미를 가지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로 그 제약이 실제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GDP 대비 몇 퍼센트의 재정 여력이 부족하므로"라는 식으로. 둘째로는 그 제약을 전제로 어디까지는 가능한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제약을 확인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둘 다 없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논의를 막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들에게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하지 말라고 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떤 제안에도 "안 된다"만 내놓으면서 스스로 더 나은 방향을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비판은 사회를 바꾸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판은 결국 그냥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이전 26화여군·여경 무능력론과 여성 징병 찬성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