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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과장 Oct 11. 2024

매일매일 난 널 기다려 준경 - 3화

자리를 옮겼지만 처음에는 다들 말이 없었다. 그나마 클럽의 희망인 재민이가 4강에서 떨어지다니. 테린이들이 들어와서 테린이 대회 우승하는 클럽으로 유명했던 파이썬 클럽인데 나, 재현이 형, 수진이, 진아 누나, 재민이가 들어오고 나서 아직까지 우승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재현이 형과 나에게는 큰 기대가 없겠지만 운동신경이 좋은 재민이에게는 클럽에서 기대가 많아서 이번 결과가 아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적막을 깨는 건 역시 우리 클럽 최고수님의 준엄한 계시, 질책, 아니 팀장님이 팀원에게 확인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재현아. 너 레슨 받고 있지? 아무리 클럽 정회원이라고 해도 사람들하고 같이 칠 수 있는 실력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해. 다들 너 트레이닝 시켜줄려고 나온 건 아니니까"


재현이 형 요즘 레슨 쉬는 걸로 아는데. 그 때 형이 지나가는 말로 뭣때매 레슨 쉰다고 이야기 했던 거 같은데. 재현이 형이 사실대로 말하면 또 분위기 험악해질거 같은데 그 때 재현이 형을 구해준 건 회장님이었다.


"당연히 받겠지요. 원래 클럽 가입하면서 레슨도 열심히 받고 테린이 대회도 본선 진출하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온 거였으니까요"


역시 회장님. 그래도 테린이 편에 서서 얘기해주는 건 회장님 밖에 없었네. 


"재민아 너는 레슨 받고 있지?"


"네 저는 계속 성코치님에게 레슨 받고 있어요. 화요일하고 금요일이요. 레슨 더 받아야하나 고민도 드네요"


저건 운동신경이랑 신체조건도 좋으면서 레슨을 뭘 또 더 받아.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


"일주일에 2번이면 됐지. 너는 테니스도 잘 치면서 뭘 또 레슨을 더 받아. "


그래 진아 누나 말이 맞다. 테니스는 취미 아닌가. 왜 이 난리를 쳐야하는가. 태어나서 사는 것도 힘들고 고등학교, 대학교, 회사에 온 지금도 계속 경쟁인데, 즐겁게 하자고 하는 취미에 이렇게 스트레스 받을 일인가. 그런데 세상은 역시 만만치 않다.


"아 누나는. 우승 못했잖아. 내가 어디가서 운동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고 실제로도 늘 잘 했는데 맨날 블랙홀 그 사람만 만나면 지진다고. 이건 자존심 문제야. 이 신체조건으로 우승을 못한다는 건 이 몸에 대한 실례라고"


"우린 동호인이잖아. 테니스는 취미야. 넌 무슨 테니스로 돈 벌 거야? 상금도 그렇게 크지도 않는데. "


'아까 그 아저씨는 코스 선택이 너무 좋던데. 신체로만 운동하는 거 같지는 않던데'


차마 속으로 생각한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입밖으로 저 소리 내면 앞으로 재민이는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테니까. 안 그래도 클럽에서 말붙일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한 걸 바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역시 고수는 고수. 상대방이 몸쪽으로 때린 강한 공에 발리를 반사적으로 반응하듯이 거슬리는 말에 입술도 바로 반응했다.


"그런 마음으로 테니스를 칠 거면 테니스를 치지 말아야 해! 클럽이 무슨 테린이 놀이터도 아니고. 어서 테린이들도 실력 쌓아야지. 회원들이 언제까지 너네랑 맞춰 쳐줘야 해! 다들 바쁜 시간 쪼개가며 운동하러 오는데 말이야. "


"아니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들 테린이 시절 거치면서 실력이 느는 거지. 코트에서 자꾸 준경이 같은 애 구박하니까 애가 기죽어서 칠 수 있는 공도 못 치고 멘탈이 나가서 더 에러 하잖아요. 아까도 준경이 시합할 때 한숨쉬니까 애가 못 치죠"


'아니 누나 그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돼...'


"저기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재현이 형이 의자를 쎄게 뒤로 밀치면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가 일어나는 재현이 형을 보며 다들 숨을 죽였다. 재민이랑 수진이는 저 오빠 드디어 클럽 나간다는 소리를 하는구나 라고 하는 얼굴로 보고 있었고, 진아 누나는 저 아저씨 드디어 고수 아저씨를 들이 받는구나. 신난다 하는 표정이었던 것 같았다. 


최고수 아저씨는 그래 올테면 와바라. 내가 테니스 판에서 버텨온게 20년이다. 너같은 초짜는 항상 있었지. 못 기어오르게 밟아주마라는 결연한 표정이었고, 회장님은 왜 우리 클럽은 늘 이럴까 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코트에서 최고수 아저씨는 재현이 형에게 특히 조언이라면 조언, 잔소리라면 잔소리를 많이 했었다. 그럴 땐 그 자리가 아니고 뒤에 와야 한다고.


"뭔데! 내가 뭐 틀린말 했어. 테니스가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야!"


"담배 필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실내가 금연이잖아요."


"..."


"제가 카운터 가서 물어볼께요. 준경아 같이 바람 좀 쐬러 나가자"


재현이 형은 아까와 다르게 의자를 얌전하게 집어넣고 밖으로 나갔다. 

''저 형 분명히 뭐 하나 터뜨릴려고 한 거 같았는데 내 착각인가. 아닌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 것 같은데


"오빠 뭐해요. 나가봐요. 재현이 오빠가 같이 바람쐬러 나가자고 했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재현이 형은 고깃집이 위치한 먹자골목 어귀에 있는 보도블럭에 힘없이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테린이 대회가 열린 날이 주말이다 보니 먹자 골목 근처에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노상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웃고있는 사람들 사이로 담배연기를 내뿜는 재현이 형의 모습은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세계사 시간에 배운 부르주아와 프로레탈리아의 빈부 격차를 보는 것 같았다.


"형, 화났어요? 원래 고수 아저씨가 조금 말을 막하는 경향이 있잖아. 짜증도 많고. 그러니 그 아저씨 머리가 없지. 형이 그러려니 해요"


당연히 맞장구 치며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재현이 형은 답이 없었다. 그리고 눈 사이로 살짝 뭔가 흐르는 것 같은


'이 형 설마 우는 거야. 나이가 40이 다 되어가는데. 아니다 넘었다고 했나 '


"준경아. 미안해. 내가 괜히 욕심내서. 멋있게 칠려다가 다운더 라인으로 타이에서 3개는 날린 거 같애. 그것만 안전하게 쳤어도 우리도 본선 가는데. 그러면 이렇게 구박 안 받아도 되는데. 끄으"


"아 형! 왜 그래요! 복식은 다 같이 잘 해야 올라가는 거지. 누가 못해서 진다 그렇게 어디 있어요. 왜 울려 그래. "


있다. 한 명이 멘탈 나가서 말아 먹으면 아무리 한 명이 캐리를 해도 테니스에는 한계가 있다. 본인 서브게임 더블폴트를 계속 하면서 내주고, 상대방 서브 리턴을 못하고. 아니면 타이가서 되지도 않는 그 놈의...


"나 사실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영어를 어느 정도 하잖아. 너도 알지? "


클럽에 외국인 한 명이 게스트로 온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까지 테니스를 쳤었는데, 한국에 영어 가르치다가 운동을 해야할 거 같아서 무작정 클럽에 와서 테니스를 치고 싶다고 왔었다. 다들 그냥 영어 단어로만 대화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등장한 재현이 형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언제 테니스를 시작했는지. 한국에서 테니스를 쳐봤는지. 여기에서 일하는지. 클럽에 가입하려면 클럽이 있는 지자체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거주하고 있어야 해서.


그런데 이 형이 하는 영어가 그냥 영어 학원 다니면서 한 영어 같지는 않았다. 취업 때문에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그 때 유학파 선생님이 하는 영어, 최소 그 수준이면 그 수준이었지 그보다 못하지는 않았었다.


"형 그 때 영어하는 거 클럽사람들이 다 봤죠. 다들 형 무슨 유학파로 알고 있던데. 어렸을 때 외국에서 자란 거 아니였어요?"


그 때 클럽에서 재현이 형이 외모와 다르게 엘리트 일 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진아 누나가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면서 저거 이태원 영어라고 자기 친구 이태원 바에서 일하는데 딱 저렇게 영어 한다면서 그 소문은 사라졌지만.


"아니야. 조기유학 같은 건 잘 사는 집에서나 가는 거지. 난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 다녀왔어."


내 친구 중에도 캐나다 워홀 갔다온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재현이 형처럼 영어하는 애들은 많지 않았다.


'아닌데 그것 보다는 뭐가 있는 거 같은데'


"형, 워홀 다녀온 거 치고 너무 잘하던데요. 내 주위에도 다녀온 애들 있는데 형처럼 영어 안 했어"


재현이 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했다는 듯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워홀을 갔지. 처음에는 다 똑같지 뭐. 재도 안 들리고, 나도 안 들리고, 일본에서 온 친구도 안 들리고. 그런데 신기한게 나는 그 중에서 문장의 한 두 단어는 꼬박꼬박 알아먹겠더라고. 그것도 정확하게"


"그래요? 근데 다들 한 두 단어는 다 알아 들었을 거 같은데요? 길어지면 못 알아 먹는게 문제지"


"맞아. 나도 처음엔 무슨 말인지 다 못 알아먹었어. 그런데 내가 집에와서 뭐 했는지 알아? "


"뭐 했는데요? "


"매일 매일 하루에 30분은 꼭 시간을 들여서 그 날 들었던 단어. 아니면 짧은 문장들을 내가 노트에 다시 써봤어. 그리고 그 문장들을 조합하면서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 보고 다음날 써먹어 봤지"


"하루에 30분이요? 대단한데요. 매일 매일이라니"


말은 대단하다고 했지만 내심 뭐 별 비결 같은 걸 기대했는데, 누구나 아는 당연한 이야기를 들으니 좀 허탈해졌다.


'아 뭐 완전 꿀팁이라도 알려 주는 줄 알았는데'


"그 때 난 깨달았지. 시간은 배반하지 않는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응? 형 이거 나 인터넷에서 너무 많이 들어본 대사 같은데. 형 정말 이 얘기하고 싶어서 나보고 나오라고 한 거야'


"그래서 말이다 준경아. 우리 이제 무조건 매일매일 테니스 1시간씩 연습하자. 야 사실 영어가 더 어렵지 테니스가 더 어렵겠나. 내가 매일매일 30분 작전으로 해냈는데, 매일매일 1시간이면 우리 전국대회 우승도 할 수 있어"


"아 형. 저 회사가 요즘 바빠져서. 하하. 하하하하"


"너 회사 거기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바빠. 그리고 아직 사원인데. 형은 사원시절 안 겪어봤냐. 우리 이렇게 무시 받으며 살 수 없어. 해보자!"


그 때 핸드폰에서 갑자기 알림 소리가 났다. 대부분의 알림은 꺼놓는데 소리가 들린 걸 보니 회사에서 온 연락인가 보다. 주말에 회사가 연락을. 느낌이 쎄한데


"형 잠깐만요.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확인만 할께요"


"그래. 난 먼저 들어가 있을께. 있지마 매일매일 1시간 매매1 이거만 하면 우린 할 수 있어"


핸드폰으로 열어본 메일에는 "긴급" 이라는 메시지가 붙은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메일을 열어보니


[긴급: M&A TFT 조직도 공유] 라는 제목의 메일이 있었다.


TFT?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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