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대단하다. 저 사람 뭐야"
"이거 동호인 대회 맞아, 무슨 선수들 대회 같애. 방금 서브봤어?"
"아니 저 사람들이 무슨 테린이야. 딱 봐도 몇 년은 친 사람 같은데"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재현이 형은 좀 언짢아 보였다. 표정을 숨기는게 쉽지 않은 사람이라 재현이 형은 자신도 저 정도는 충분히 칠 수 있지 않나 이런 내색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준경아. 우리가 솔지기 예탈 했지만 내가 저 정도는 치지 않냐? 서브가 나보다 빠른 건 인정해. 하지만 내 서브도 받기 까다롭고. 스트록도 나보다 회전이 많이 걸려. 그렇지만 내 포핸드도 깊숙하지 않아?"
재현이 형의 말은 완전 다 틀렸다. 형의 서브는 빠르지 않기 때문에 까다롭기는 커녕 상대편에서 엄청 세게 리턴해서 재현이 형의 서브게임은 일단 주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재현이 형의 포핸드가 깊숙하게 상대방의 코트에 꽂히긴 하지만 스핀이 없어서 너무나 편안하게 저기서 받아넘긴다. 하지만 난 그 모든 걸 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렇죠 형. 형 공은 쉽지 않죠. 제가 잘해야 하는데. 제가 좀 더 열심히 할께요"
"아니. 니가 뭐 못한다는게 아니고. 우... 우리도 충분히 저기 4강전에 들어갈 수 있는데. 아쉽다 이거지 뭐. 야. 다음엔 무조건 입상이다 알았지?"
쉽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실내 운동이 금지되면서 테니스라는 운동이 새롭게 각광받으며 어마어마한 수의 젊은 층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유입된 만큼 운동신경이 좋은 남자들도 많았다. 30대 초반이지만 애매한 운동신경의 나와 40대 초반의 재현이 형이 경쟁하기에는 신체조건에서부터 체력, 운동 센스 등 차이나는 경쟁 테린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지금 저기 코트에서 4강전을 치르는 4명처럼.
"곧 경기 끝나겠는데. 게임 스코어 5:2네. "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걸 보니 진아 누나인가.
"그래도 재민이 오빠가 이번 서브 하나 잡아주고 노애드 가고 잘 버티면 어떻게 될 지 모르지 않을까요? 이 게임만 이기면 결승인데"
역시 수진이는 착해서 저렇게 희망을 가지고 말하는 구나
"아냐 수진아. 저기 재호라는 애 서브 되게 좋아. 재민이가 우리 클럽에서는 기대받는 유망주이긴 해도 저기 재호는 우리 시에서 주목하는 동호인 인재야. 저 재호가 우승할걸?"
오 재현이 형. 이렇게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어? 아닌가. 생각해보니 자기 테니스 실력 빼고는 대부분 정확하고 꽤 날카로운 분석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재현이 형에게 말하려는 순간
"와!!! 서브 에이스다."
"T존으로 완전 꽂혔어"
"끝났네. 재민이는 4강에서 끝났구나. 그래도 입상이 어디야. 수진이랑 나는 예선 통과하자 마자 본선 1회전에서 떨어졌는데. 4강은 아무나 가나. 대단하다"
방금 게임이 끝난 코트에서 승자와 패자 모두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4강까지 간 실력자들이라 다른가. 재현이 형은 얼굴이 울 것처럼 인사하던데.
"재민이가 고생했네. 4강까지 가고. 요즘 테린이들이 테린이가 아니던데. 저기 상대방 코트에 저 친구는 내가 쳐도 못 이기겠는데"
"어머 회장님 언제 오셨어요? 다이아랑 골드 대회만 구경 다니시는 줄 알았는데 테린이 대회도 오시는 거에요?"
"우리 클럽의 미래들이 여기 있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저기 영환씨는 흘러가는 물이야. 여러분들이 잘해야 인피티니가 계속 잘 나갈 수 있지"
파이썬 클럽 회장. 이대욱 회장님. 나랑 재현이 형을 파이썬에 받아준 고마우신 분이다. 처음에 레슨 코치님이 나랑 재현이 형을 파이썬 클럽에 소개시켰을때,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랠리도 제대로 못하고. 그렇다고 키가 180이 훌쩍 넘어 향후 포텐이 있다고도 하기 애매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썬는 원래 테린이들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고자 만든 클럽이라면서 받아준 회장님 덕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아직도 레슨만 받고 있을 지 몰랐다.
"재현이랑 준경아. 너네 본선은 갔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나랑 재현이 형이 클럽에 가입하려고 할 때 반대가 심해서 회장님이 저 2명이 테린이 대회 본선진출을 하겠다라는 조건이었는데 그걸 실패했으니 볼 면목이 생기지 않았다. 회사도 아닌데 이렇게 송구스러운 일이 생길 줄이야. 재현이 형이 뭐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이 없어서 그냥 이실직고 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저희 예탈했어요. 저희가 이기고 있었는데 타이에서 떨어졌어요"
"떨어졌다고...? 아이고 신인부 전국대회도 아니고 지역 관내 대회도 아닌 테린이 대회를 떨어지다니"
역시. 예탈은 참 스트레스를 주는구나
"에이 회장님. 신인부 대회 예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클럽에 몇 명이나 있다고요. 아 그리고 저희가 첫출전이라 좀 긴장했던거 같아요. 다음에는 무조건 입상입니다"
"말은 잘하네.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것처럼 니 포핸드도 좀 시원하게 뿌리면 좋겠다. 맨날 그렇게 답답하게 치지말고"
'푸욱'
"어머 언니 옷에 커피 묻었어요"
"아니 안 뿜을 수가 없네. 나만 재현 오빠 스트록이 먹먹하다 생각한게 아니였나봐. 회장님 비유가 너무 찰떡이야. 하하"
"그래. 재현아 레슨 좀 더 받으면서 포핸드 좀 더 갈고 닦아봐. 파트너가 발리가 좋은데 니 포핸드가 찬스를 못 만드니까 파트너의 장점을 못 살리짆아. "
재현이 형은 40대 초반의 나이에 맞지 않게 입이 댓발 나와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 현대 테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핀이다. 과거에는 선수들이 치는 공에 어마어마한 스핀이 걸려 있었는데 최근에는 동호인도 선수 만큼은 아니지만 탑스핀을 강하게 거는 구질의 공을 대부분 구사하고 있다.
나는 뭐 그럭저럭 탑스핀 구질의 공을 칠 수 있는데 재현이 형은 신기하게도 공에 스핀이 적은 플랫성의 공을 치고 있어서 클럽에서도 늘 잔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다. 사실 아까 타이브레이크에서 재현이 형이 노린 다운더 라인 코스의 공도 스핀이 조금만 더 걸려 있었으면 들어갔었을 공이다. 아 생각해보니 열받네
"재현 오빠랑 준경 오빠도 다음 대회에서는 본선 갈 거에요. 처음부터 누가 잘 해요"
역시 착한 정수진이. 그래도 클럽에서 우리 둘을 응원해주는 몇 안 되는 착한 회원이다. 수진이랑 혼복으로 게임 나가면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물어봐야지.
"아니야. 스핀이 안 많아도 플랫으로 잘 치는 사람은 다 잘쳐. 나를 봐. 나도 스핀이 안 많아. 제대로 레슨 안받아서 공이 다 플랫이지. 그래도 신인부 우승했잖아. 플랫이 무슨 죄야. 사람이 문제지"
아 맞다. 우리 클럽 최고수이신 이 분도 재현이 형이랑 공의 구질이 비슷하다. 물론 공의 파워랑 코트 빈 곳을 찔러서 오는 코스는 당연 비교 불가이지만. 하필 최고수이지 잔소리가 많으신 분과 구질이 비슷해서 재현이 형은 비교도 더 많이 당하는 편이다. 그 때 함성 소리가 들렸다.
"와 끝났다. "
"역시 블랙홀이야. 저 클럽은 대회 때마다 결승 진출자를 만드네. "
"내년까지 김재호가 계속 우승하지 않을까? 너무 잘하는데. "
"다들 고생했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재민이도 오면 짐 챙겨서 파닭파닭으로 오라고 해"
그렇게 파이썬 클럽 테린이들 5인방의 첫 테린이 대회는 막이 내렸다.
"아 왜 닭이야. 난 고기가 좋은데. 회장님 고기 먹으러 가면 안 되요. 치킨 먹으면 살쪄요"
역시 진아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