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상대 코트에서 기쁜 목소리로 누군가가 콜을 불렀다. 재현이 형과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터벅터벅 코트 중앙 네트로 걸어갔다. 우리 모습은 누가봐도 패잔병의 모습 같았고, 반대편 코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은 승전보를 들고 개선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같았다.
"준경아, 지금 몇 시야?"
"어... 오전 10시 20분인데요"
"그거밖에 안 지났어? 예선 탈락하면 점심 먹고 집에 간다던데, 점심도 아니고 브런치 먹게 생겼는데"
재현이형과 나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좋은 토요일 오전에 테니스 코트가 12개 정도 있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지금 그 핫하디 핫한 테니스를 대회 참가하는 아니 참가했었던 중이었다.
'내가 어쩌다 주말에 여기서 테니스를 치고 있지. 왜 테니스를 시작하게 되었더라'
대학교 졸업하고 취준만 1년을 했었다. 인서울 대학교를 졸업해서 1년 안에는 일자리를 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공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심리학과.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프로이트 처럼 꿈을 엿보고 그 사람을 파악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지원했었다. 이런 나의 바람은 입학하고 일주일 만에 박살이 났다.
"여러분 여기 설마 프로이트 때문에 심리학과 오신 분은 없죠? 없길 희망합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이 앞으로 공부할 내용과 머릿속에 그리는 내용은 상당히 다를 거에요"
'교수님이 저 말을 던졌을때 난 쓰나미급 충격을 받았다. 뭐지 저것 때문에 난 이 과에 지원했는데...'
그렇게 대학생활 내내 실험 셋팅과 실험 통계치 검증에 시달리면서 학교 생활을 보냈다. 덕분에 예전만큼 숫자를 병적으로 싫어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숫자 감각이 생겨 3학년 올라가면서 경영학과 복수 전공도 신청할 수 있는 깡도 생기게 되었다. MBTI I 성향이라 사람들과 으쌰으쌰 하면 금새 에너지가 떨어지기 때문에 취업엔 유리해도 경영학을 복수 전공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깡 덕분에 재무 위주 수업을 들으면서 경영학 복수 전공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도 취업이 쉽지는 않았지? 요즘 대학생들 학점 관리 안 하는 친구들 누가 있고 경영학 복수 전공 도전 안하는 애들이 누가 있냐?"
"맞아요. 저처럼 애매한 애들이 대학원 지원하기에도 어렵고, 취업하는 것도 하.. 진짜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집 안에만 갇혀 있으니 너무 답답했었다. 터벅터벅 동네 공원을 걷다가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공원 테니스 코트에서 들려오는 테니스 공치는 소리였다. 학생 때는 알바하고 수업 듣느라 공원을 올 일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다 농구랑 축구를 하지 테니스 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테니스 공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테니스 공을 치는 타구음 이라고 해야하나 들으면 들을 수록 귀에 착착 감겨왔다. 테니스 라켓과 공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좋아서 멍하게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한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학생, 이 쪽으로 와서 구경해요. 거기 있으면 다칠 수도 있어"
헤어밴드를 한 딱 봐도 185는 될 거 같은 건장한 체구의 아저씨가 나를 코트 한 쪽으로 불러세우더니 벤치에 앉으라고 했다. 20분 정도 지난 후, 그 아저씨는 자기를 코치라 소개하면서 테니스 레슨 신청하러 온 거냐고 물어봤다.
"레... 레슨이요? 아 저는 지금 취업 준비 중인데... 여유가 많지 않아서요... 테니스도 오늘 처음 봤어요"
"아 레슨 신청하러 온 게 아니였어? 난 또. 괜찮아. 원래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거에서 시작하는 거야"
"제가... 그.. 공.. 공부하러 가봐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뭘 그렇게 도망치듯이 가. 여기도 사람 사는데야. 안 잡아먹어. 음료수나 하나 먹고 가"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음료수를 강제로 내 손에 쥐어주고 앉아서 구경이나 하라고 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나는 한 20분 동안 다른 레슨생이 레슨 받는 걸 지켜봤었다. 연두색의 테니스 공이 코치로부터 시작해 레슨생의 코트로 넘어가고 그 레슨생은 자신의 라켓으로 공을 치면서 아까 끌려왔던 그 소리가 들려왔다.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들려오는 팡팡 테니스 공치는 소리는 조금씩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일주일 후 나는 성희완 코치님으로부터 테니스 레슨을 시작했다.
그리고 난 어느기업 재무팀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전공을 살리지는 않았지만 숫자와 친해진 덕분이라고 나름 분석했는데 나를 뽑은 재무팀의 팀장님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준경씨는 착해보여"
"아 네 제가 그런 이야기는 좀 듣습니다"
"사람의 인성은 중요하거든. 사실 재무팀이 착한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아. 우리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굉장히 싸우는 편이야"
'뭐야. 그래서 나 다른 데로 보내겠다라는 건가? 아니면 수습기간 동안 전사가 되라는 건가'
"하지만 재무팀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지. 준경씨 뭐일 거 같애?"
"엑셀인가요? 피벗이나 함수 잘 아는거?"
"아니야 아니야.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야. 우리는 사고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 숫자 틀리는 것도 사고지만 횡령이나 이런 걸 시도하는 사람들은 재무에 있으면 안되는 거야. 횡령 매력적이긴 하지 걸리지만 않으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거든. 준경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걸 내가 면접에서 딱 알아봤지"
'내가 쫄보라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 뭐지. 첫 날부터 왜 저러는 거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떠오른 건 파트너인 재현이 아웃시켜서 타이 브레이크에서 져버린 그 공 때문이었다. 다운더라인. 상대방의 코트에 크로스로 공을 보내지 않고 직선으로 보내는 코스 다운더라인. 나라면 그 공을 크로스로 보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할 때 좋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오빠 본선 갔어요?"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재현이 형이 먼저 대답했다.
"어 수진이구나. 우리는 예탈했어. 야 10시 20분에 대회가 끝날지 몰랐는데. 뭐해야 하나. 너네는 어떻게 되었어?"
아니 난 우리가 타이 브레이크도 가고, 내가 아니라 재현이 형이 무리하게 서브를 리턴했기 때문에 졌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그냥 안전하게 리턴만 했어도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고. 수진이한테 본선 갔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고.
"저희는 1승 1패로 본선 갔어요. 재민이 오빠가 그러는데 1승 1패면 조금 있으면 바로 다음 게임 들어갈 지도 모르니까 간단하게 뭐 먹고 있으라고 하더라구요"
아 맞다. 재민이 자식도 있었지. 재민이는 나와 재현이 형과는 다르게 클럽에서 기대를 받고 있는 소위 유망주이다. 회사로 따지면 핵심인재, 축구 구단으로 보면 핵심 유망주.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시작한 시점도 비슷한데 재민이가 치는 공을 보면 완전 어나더 레벨이다. 역시 유전자인가.
"재민이는 올라갔대?"
"재민이 오빠조는 2승해서, Bye 탔다고 하던데요. 다음 경기는 부전승이라고 페어랑 밥먹으러 갔어요"
"형 Bye는 무슨 말이에요? 부전승은 알겠는데"
"놀랍게도 영어로 부전승이 Bye 란다"
"진짜요? 난 사람들이 그냥 바이 바이 하길래 잘 모르지만 그냥 바이라고 했는데 그게 영어로 부전승일지는 몰랐네요. 역시 오빠 워킹 홀리데이 갔다왔다고 하더니 영어 좀 하네"
저 형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 영어를 좀 하는 모양이다. 코트에서 게임이 없어 쉬고 있을 때 자기 영어 잘한다고 하더니 진짜 하네. 그러면 뭐하나 아까 다운 더 라인 공 날려 먹은 거 보면 사람이 모든 재주는 가지고 있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다들 여기 있었구나. 수진아 다음 경기 준비 안 해? 몸 식으면 안 되. 내가 맞발리라도 해줄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파이썬 클럽의 촉망받는 유망주 정재민이 나타났다. 재현이 형에게 관심이 있어서 왔게냐만은. 사실 수진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걸어볼려고 한 거겠지. 내심 아니꼬왔는대 재현이 형도 그런지 잽싸게 받아쳤다
"수진이는 우리랑 가서 뭐 먹고 올거야. 본선 준비해야하니 든든히 먹여야지. 수진아 짜장면 괜찮아?"
"아니 다음 경기 준비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런 헤비한 거 먹이면 어떻게 해요? 예탈한 사람들이야 편하게 먹어도 되지. 여기는 아직 해야할 게임이 남았구만. 내가 샌드위치 좀 남는 거 있는데 그거 줄께"
수진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진아 누나였다.
"아 나 짜장면 먹을래. 샌드위치 그거 먹고 다음 게임 못해. 재현 오빠가 사는거지? 수진이 우리 후딱 갔다오자. 내가 코치님한테 물어보니까 우리 밖에서 뭐 먹고 와도 된대"
이진아. 진아 누나. 수진이의 파트너. 수진이 보다 키도 커서 여자치고 강력한 서브를 가지고 있고. 옷도 화려하게 입어서 은근 팬들이 많다.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인스타에 서브 영상도 올리고 번개도 많이 다녀서 인스타 팔로워가 몇 만 이라나.
"아 누나. 선수가 컨디션 관리 해야지. 그래서 입상 하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재민이랑 수진이 진아는 저기 10번 코트 관중석으로 와"
"어. 언제 오셨어요? 테린이 대회 구경 오신거에요?"
재현이 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알려주듯 형이랑 내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장영환. 파이썬 클럽의 최고수. 나랑 재현이 형이 코트에서 게임하면 매의 눈으로 우리를 봐주시는 분. 더 잘칠 수 있는 공도 옆에서 이 분이 보고 있으면 괜히 주눅 들어서 못 치게 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10번 코트에 뭐 있어요? 난 짜장면이 더 좋은데"
나이스 진아 누나. 역시 최고수에게 밀리지 않는 깡. 테니스 세계에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저 깡다구가 중요한데 진아 누나는 실력은 밀릴 지 몰라도 깡다구 하나는 내가 본 여자들 중 최고이다.
"회장님이 테린이 대회 참여하는 클럽 사람들 고생한다고 탕수육이랑 짜장면이랑 시켜놨어. 그러니 너네는 어디 가느라 힘빼지 말고 거기서 끼니 해결해"
"진짜요? 준경아 가자. 아까 타이 브레이크 까지 하느라 힘들었는데 가서 뭐 좀 먹자"
그런데 고수 아저씨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너네가 감히? 라는 표정인데 그래도 젠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재현이랑 준경이는 나가서 먹고 올래? 지금 클럽 운영진이랑 본선 진출자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거 같아서 말이야. 너네는 뭐 사실 시간도 많잖아. 너네끼리 가서 먹고 오고 있다가 대회 끝나고 뒷풀이 할 거니까 거기에서 다 같이 저녁 먹자. 알겠지?"
와... 테니스 세계가 서럽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짜장면 가지고도 차별하다니. 옆에서 나와 똑같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눈동자에서 전의가 불타오르는 재현이 형이 말을 꺼냈다.
"네에으. 저..희는 나가서 먹고 올께요. 있다가 저녁에 뵈요"
주차장으로 가는 둘의 모습은 아까와 같은 패잔병의 모습이지만 조금 달랐다. 나는 여전희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재현이 형은 독기 어린 눈빛을 가진 포로가 된 패잔병.
"준경아. 우리는 다음 대회에 무조건 입상하는 거다 알겠지? 너 시간 무조건 비워놓고 나랑 이제 연습하는 거야"
"저희 연습해도 될까요? 테니스도 결국 유전자빨 같던데"
"아니야. 테니스만큼 멘탈 스포츠가 없다고 했어. 우리가 더 강한 상대들과 연습하고 스마트하게 플레이 하면 되. 걱정하지마 형이 다 전략 짜올테니까"
'형 그럼 아까 타이에서 그 말도 안 되는 다운더라인은 왜 친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