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은 테린이 대회와 회식이 끝난 후 집에 들어와 샤워를 끝내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테니스 때문에 새로 바꾼 핸드폰이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에 관심이 없어서 가벼운 핸드폰만 쓰다가, 게임 영상을 찍을 때, 보다 좋은 카메라로 찍어야 부족한 점이 잘 보인다고 해서 중고로 산 최신형 고급 핸드폰이었다.
'이걸로 바꾸고 나서 지원이 한테 욕 먹었지. 데이트 할 때는 늘 거지같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더니 테니스 때문에 핸드폰 바꾸는 거냐고. '
그의 핸드폰에는 여자친구인 지원이로부터 몇 개의 카톡이 와 있었다.
'오늘 대회 잘 해 '
'대회 끝나고 저녁 같이 먹을까? '
'하루종일 테니스 사람들이랑 사는구나...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고 잘 쉬어 '
재현과 지원은 사귄 지 오래된 커플로 곧 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재현이 얼마전 회사를 퇴사하면서 둘 간의 연애에도 묘한 기류가 흘러가고 있었다.
"오빠, 그냥 회사 다녀. 원래 회사가 다 그래. 더럽고 치사하고. 누가 자기실현하러 회사 다니는 거 아니잖아.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하면 되잖아 "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거 다른 분이 하던 다 만들어 놓은 프로젝트를 가져가고, 거기에다 내가 해놓은 거까지 거기 붙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난 아무 것도 안 한 놈이 될 거 같애 "
"그렇다고 그걸 임원에게 바로 메일 쓰는 사람이 어딨어. 뭐 이미 보낸 메일은 할 수 없지만."
"..."
"오빠. 그냥 팀장님에게 죄송하다고 내일 말하고 임원한테도 오해가 있었다고 면담해. 이거 수습 안하면 진짜 그림 이상하게 될 걸? 알았지? "
"..."
"아 몰라. 하고싶은대로 해. "
재현은 팀장에게 사과도 하지 않았고, 임원에게 따로 가서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본인이 겪었던 상황과 관련 증거를 자세하게 시계열적으로 정리해서 메일을 보냈을 뿐. 그러면 최소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회사라면 적절한 조치가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다. 작은 회사도 아니고 프로야구 팀이 있는 회사인데 팀장이 잘리지는 않아도 다른 부서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건 재현의 타 부서 전보 공고였다. 그리고 재현은 회사를 퇴사했다.
"미안해. 이렇게 될 지는 정말 몰랐어. "
"하아... 그러니까 내가... 아니야. 됐어. 이미 결과는 나왔고,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해도 오빠는 내 말 안 들었을 거야. "
"좀 쉬면서 뭐 할지 생각 좀 해볼께. "
"오빠가 능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아직 이직 못할 나이도 아니고 지금까지 한 프로젝트도 있으니까. "
"나 운동 좀 열심히 하고 에너지 충전도 하고 머리 좀 환기 시킬라고. 테니스 재밌을 거 같애. 같이 해보자. "
"테니스? 어려워 보이던데. 일단 알겠어. "
그렇게 지원은 재현과 테니스를 처음에 같이 시작했지만, 지원은 중간에 체력적으로 힘들고 회사가 바빠지면서 레슨을 그만두고 재현이만 아직 계속하고 있었다. 이 테니스 때문에 둘이 말다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구직 준비 잘 하고 있어? 회사에 이력서 보낸 거 연락은? "
"어휴 무슨 시어머니야? 어련히 알아서 다 지원했을까. 연락 기다리고 있지. "
"그럼 이제 뭐하게? "
"이제? 조금 있다 코트가서 다른 레슨자들이랑 게임하기로 했어. 코트가 빈다고 코치님이 알려줘서. "
"테니스가 그렇게 조아? 그냥 그거 취미생활이잖아. 이제 다시 회사도 가야하고. 돈도 벌고. 우리도..."
"..."
"알았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회사에서 연락오면 꼭 알려주고. "
"어 알겠어. "
그 뒤로 지원은 테니스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원이도 연락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너무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회사에서 반겨주는 20대 후반 30대 초반 나이도 아니였기 때문에 처음 생각이랑 다르게 면접보자고 연락이 오는 경우가 아직 없었다. 그 답답함을 풀어주는게 테니스였다. 공이 제대로 라켓에 맞았을 때 나는 그 시원시원한 소리가 재현의 마음을 달래주기 때문에 테니스를 하루라도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클럽에서 매칭을 기다리고 있을 때, 준경이가 물어왔다.
"형은 테니스가 좋아요? "
"좋지. 이렇게 코트에서 공을 팡팡 치면 가슴이 뚫린다. "
"그런데 형은 테니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기도 해서요. 저도 공이 안 맞는 날은 속상하긴 한데 형은 좀 저보다 더 속상해 하시는 거 같아서. "
"내가 그런가? 난 그냥 즐겁게 치는데? "
"진아 누나랑 수진이에게 나중에 한 번 물어보세요. 코트 났네. 게임 들어가요 형."
"흠.... 정말 나 테니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건가. 다들 그렇게 이야기 하네. "
준경은 수진과 함께 맥주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재현이 오라고 한 장소는 재현의 집 근처로 준경이 자주 와보지는 못한 곳이었다. 재현은 신도심 내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고, 준경은 구도심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피스텔이 있는 큰 길 쪽만 알고 있었지 주거지 지역 뒷쪽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여기는 동네가 조용하네. 좋다. 아파트 뒤에 바로 작은 공원도 있고, 사람들은 산책하러 다니고. "
"그러게요. 저도 어렸을 때 이 근처 살았는데 여기 공원이 있는지는 몰랐네 저기 벚꽃나무도 있고. 봄에 와보면 정말 사진찍기 이쁘겠다. 오빠도 벚꽃보러 가서 사진찍는 거 좋아해요? "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
"왜요. 아까 그 언니랑 벚꽃보러 가면 되잖아요. 아니에요? "
"에이. 그 분은 대리님이지. 그것도 본사에 계시는 대리님. "
"대리면 그렇게 높은 거 아니지 않나요? 나중에 오빠도 대리달텐데. "
"아냐 그런 본사에서 주요 부서에 있는 분들은 승진이 거의 보장되고 나중에 계열사로 와도 직급이 높아져서 온다고 하더라고. 나랑은 뭔가 좀 다르지. 그리고 프로젝트로 알게된 거라서 프로젝트 끝나면 언제볼 지 또 몰라. "
"아 그렇구나. 난 이미 그 분이랑 썸타는 줄 알았지. "
'이건 또 뭐야. 지는 정재민이랑 혼복 나갔으면서. 뭐지. 이건. '
그 때 즈음, 준경과 수진은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호프집은 파이썬 클럽이 자주 가는 집이랑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더 깔끔하고, 약간은 가격이 있을 거 같은 맥주집. 카운터 근처에 외국 생맥주를 제공하는 탭들이 주루룩 펼쳐져 있었다.
"준경아 여기야 여기. "
"오 형. 여기 뭔가 좋아 보이는데요. "
"오빠 나 여기 블로그에서 본 거 같아요.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클럽 사람들은 여기까진 안 와서 아쉬워 하고 있었는데 딱 이렇게 오게 되네요. 여기 블로그에 치킨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치킨 시켜도 되요? "
"수진이 알고 있었네. 만야 여기 맥주집인데 치킨이 프랜차이즈 치킨집보다 맛있어. 내가 치킨은 이미 시켜놨어. 각자 먹고 싶은 술만 시키면 되. 여기 다양한 맥주 생맥으로 마실 수 있으니까 메뉴판 보고 주문하고. 오늘은 축하하는 자리니까 내가 살께. "
"재현 고수님. 정말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
"뭐야 수진. 쏘면 고수 되는 거야? 고수 되기 쉽네. 하하 "
"고마워요 형. 그리고 입상도 아니고 본선인데. 뭘 축하까지. "
"아니야. 본선이 어디야. 나는 해보지도 못한. 그리고 너네한테 타이로 이긴팀이 우승했던데. 다른 팀은 타이도 못 가고 졌어. 너네만 타이까지 간거야. 사실 상의 결승이었어. "
"진짜요? 그건 몰랐네. 우리가 못한게 아니였구나. 나 잘했네. "
"에이. 그건 아니죠. 오빠가 잘했다기 보다는 오빠의 파트너 언니가 수퍼 에이스 였을뿐. 그런 수퍼에이스를 두고도 입상을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죠. "
"그 분이 그렇게 잘 해? "
"장난 아니에요. 원래 혼복은 남자가 메인이고 여자 파트너는 자기 자리 잘 지키면서 앞에 오는 공 발리 해주고, 뒤에 있을 때는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되는 거 잖아요. 그러다 보면 남자 파트너가 찬스가 왔을 때 강력한 공을 치거나 발리 포칭 나가서 포인트 따는 거고"
"그렇지. 그게 혼복이잖아. "
"그런데 이 팀은 여자와 남자가 바뀌었어요. 준경 오빠 파트너가 스트록이 더 세고, 발리도 더 잘 하고. 보통 혼복하면 여자가 포 자리에 서고, 남자가 백에 서는데, 이 팀은 반대였어요. "
"수진. 뭔가 너 신나 보인다. 내가 못하는 거 자랑하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
"아니 아니. 아까 그 언니가 재민오빠 보다 더 잘 치는 거 같았어요. 그 언니랑 한 번만 대회 같이 나가보고 싶어요. 혹시 그 언니에게 물어봐주실 수 있어요? "
"쉽지 않을 걸. 너는 진아 누나가 있잖아. 아 진아 누나도 이미... "
"뭐에요. 진아 언니가 저 버리고 다른데로 간대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어떡하지.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거 였네. 큰일났다. '
그 순간 주문했던 맥주와 안주가 테이블에 도착했다. 직원이 원래 치킨은 나오는데 오래 걸리는 건데 먼저 주문해놓은 덕분에 맥주와 치킨이 같이 나오는 거라며, 주문하신 분의 센스를 칭찬하고 갔다.
"자. 이제 술도 나왔는데 한 잔 하자. 다시 한 번 축하해. 본선진출 "
"고마워요 형. 그런데 형이랑 예선 올라가고 더 올라갔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우리가 그 동안 연습한 시간이 있잖아요. "
"그래서 말인데 사실 오늘 보자고 한 게 뭐냐면 "
"뭔데요? "
"나 테니스 이제 접을까봐. "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테니스를 접는다는게. 대회를 안 나가겠다는 말이에요? 아니면 아예 테니스를 안 치겠다라는 거에요? "
"왜 근수저라는 말이 있듯이 테니스도 테수저가 있는 거 같애. 레슨은 내가 재민이보다도 더 받았는데 못하고. 아니면 대학 때 그것도 아니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시작한 친구들은 금방 금방 느는데 나는 벽에 부딪힌 거 같애. "
"형. 테니스는 원래 쉽지 않다잖아요. 처음 4년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쳐야 는다고 하던데요. "
"그 말도 맞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서 죄송하다, 미안하다 라는 말은 테니스 시작하고 제일 많이 해본 거 같애. "
"오 오빠 그건 맞아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가 무슨 조건 반사야. 내 파트너 실수인데 나도 모르게 내가 미안하다라고 한 적도 있어요. "
"사실 내가 영어를 잘 하는 편이거든. "
"진아 언니가 말해줘서 들어본 적 있어요. "
"그 때는 내가 영수저였나봐. 나는 어릴 때 미국에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 유치원 다닌 것도 아니고 외국에 1년 동안 살았던 적 밖에 없는데 영어를 훨씬 잘하는 편이었어. 외국에 석사 다녀온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했거든"
이 형이 영어를 잘 했나. 나보다 좋은 회사 다니는 건 알았는데 영어 잘하는 지는 몰랐네. 영어 잘 해서 좋은 회사 다니나보다. 그래도 대기업인거 같았는데.
"그래서 영어회화 스터디 같은 걸 많이 다니기도 했고 외국에 있을 때는 잠깐 어학연수도 하고 그랬지. 그 때 사람들이 내게 항상 물어봤어 영어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냐고. 그래서 나는 뭐 별 거 없다. 복습 열심히 하고 단어나 새로운 표현 늘 암기하고 말하거나 글 쓸 때 적용하려고 시도하다보니 자연스레 늘었다. "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약간 너무 정석적인 답변인거 같기도 한데요. 그거보다 뭔가 꿀팁 같은 걸 원했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 땐 그렇게 생각했지. 실력 느는데 꿀팁이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저 사람들 제대로 노력 안 한거 아니야? 하면 다 되는데. 아 맞다. 그런 것도 있었어. 영어회화 스터디 가면 사람들이 연락처도 많이 물어봤어. 다른 스터디에도 나와달라고 하기도 하고. 모임에 계속 나와달라고 하고. 왜 고수들에게 우리 클럽 계속 와주세요 하는 것처럼 하하 ""
그런가. 영어가 하다보면 재미있나? 나는 꽤 고통스러웠던 거 같은데. 토익 점수 리스닝이 생각보다 오르지 않아서 스트레스 받았고, 회사 면접 볼 때도 그래도 대기업 계열사라고 영어 면접까지 봐서 괴로웠는데 그게 재미있나?
"근데 테니스는 달랐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테니스를 치고나니까 나한테 영어를 어떻게 하면 잘하냐고 물어봤던 사람들을 이해했어. 나도 똑같아. 인터넷 게시판에 어떻게 하면 테니스를 잘 칠까요? 다운더라인을 에러하지 않나요. 이런거 맨날 물어보고 있어. 그리고 잘 치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그 때 알았어. 아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그 사람들이 물어봤구나. "
"그러네요. 이제 진정한 역지사지가 되었네요 형. "
"그래 그 사람들이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알 거 같애. 나 요새 테니스 때문에 스트레스 되게 많이 받거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데 너무 안 늘어. 4년은 쳐야 한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쭉쭉 나가는 거 보면 너무 답답해.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까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쳐야 하나 란 생각도 들고. 그냥 이거 공놀인데 이게 뭐라고. 이거 잘 하면 돈이 나오나. "
"오빠. 근데 진짜 그냥 공놀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 다 오빠가 신입들 중에 레슨도 가장 열심히 받고, 제일 열심히 치는 거 다 아는데"
"에이 뭐 공놀이지. 그래서 그냥 클럽에서 이제 내 마음대로 치고, 대회는 모르겠고.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고 할라고. "
"그럼 테린이 대회는요? 준경 오빠랑 둘이 나가기로 했잖아요! "
"그래서 준경아. 일단 나도 대신 파트너 찾아볼께. 너도 한 번 찾아볼래? "
네? 형 대회가 얼마나 남았다고. 파트너 구하는게 그리 쉽나 이 사람아. 아저씨만 믿고 다른 사람이 대회 같이 나가자고 한 것도 거절했는데.
"아니 형.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요. "
"그래서 내가 술 지금 술 사는 거 아니겠니. 알았지? "
재현이 형의 그 이야기로 인해 분위기가 식어져서 늦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맥주 1잔만 하고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수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재현이 오빠, 테니스 그만두지 않을 거에요. "
"진짜? 왜? "
"저 오빠가 자존심이 얼마나 센대요. 지금 자기가 같이 시작하거나 늦게 시작한 사람보다 못 쳐서 자존심이 상해서 저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얘기해서 대회 나가봐요. "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어. 오늘 파트너는 게임하면서 내가 되게 마음이 편했거든. 잘 하는데 마음도 편하게 해줘. 그런데 재현이 형이랑 하면 그 부담감이 장난아니야. 그래서 더 실수하는 거 같애. 나도 지금 상황에선 어쩌면 다른 파트너를 찾는게 나을 지도 이런 생각도 들어. "
"그래도 페어로 지금 계속 합을 맞춰왔는데 잘 다시 얘기해봐요. "
"알았어. 다시 얘기해보지 뭐. 오늘 대회 때문에 고생했어. 클럽에서 보자. "
"조심히 들어가요. "
수진이 말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였다. 얼마전까지 테니스는 인생이라고. 모든 걸 걸어야 잘 할 수 있다고 해놓고서는 이제와서 그냥 공놀이라고 하니까 믿기지도 않잖아. 아 모르겠다. 테니스가 어려운 운동인 것도 맞는데 다른 걸로도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