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경이. 혼복 본선 나갔다면서. 오. 드디어 올라가는 구나. "
"아 그래? 드디어 우리 영건들도 좀 실력이 올라오는 구나. 그래 그렇게 하나하나 올라가면 되. "
"아직 현수막은 못 걸겠네. 입상 어서 해봐. 그래야 파이썬도 현수막을 올리지. "
혼복 대회가 있던 주말이 지나고 클럽에 가니 형들이 대회 가지고 한 마디 씩 계속 건넸다. 내가 대회 나가는 거 숨기고 나갔는데. 재현이 형인가? 아니면 수진이랑 재민이? 아니다. 수진이랑 재민이가 같이 혼복 나간거 알면 클럽에서 바로 썸타는 거 아니냐고 말 나오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내가 말했어. "
"어 누나? 누나가 제가 대회 나간 거 어떻게 알아요? 말 안했는데. "
"나랑 희윤이 인친이잖아. 그리고 희윤이가 니 혼복 파트너랑 또 인친이드라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 그래도 본선까지 갔던데. "
"아 나만 나간건 아닌데. 거 참. 말을 할 수도 없고. "
"알아. 수진이가 이미 나한테 얘기했어. 말하지 말아 달라고. "
"어 진짜요? 그럼 개네 둘이 진짜 뭐 있는 거에요? 사귀는 건가. "
진아 누나는 씨익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클럽의 문을 갑자기 닫더니 조용히 다시 물어왔다.
"글쎄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던지. 근데 준경이 니가 그게 왜 궁금한거지. "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냥 클럽 사람들끼리 오해하면 일이 생기면 안 될 거 같아서. "
진아 누나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재미있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누나 지금 보니까 엄청 탔네. 얼마나 테니스를 열심히 쳤으면.
"그러면 너랑 그 파트너는 뭔데? 너 거기랑은 썸타는 거야? "
"아니라고! 그 분은 우리 회사 아니 내가 있는 회사의 본사에서 일하는 높으신 대리님이라고. 나는 그냥 하찮은 사원이고. "
"그럼 니가 대회 나가자고 했어? "
"아니. "
"그럼 거기가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야? 혼복 대회는 보통 같이 많이 쳐본 사람들한테 나가자고 하는데. "
"저번 회식 때 내가 재현이 형이랑 대회 나가서 예탈했다 이렇게 궁상 떠니까 안 되서 같이 나가자고 한 거야. 그게 다야. "
"청춘들은 좋네. 흐음. 잘 해봐라. "
잘 해보긴 뭘 잘해봐 라고 맞받아 칠려고 할 때, 닫힌 문 사이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 좀 잘 해봐! 리턴을 그렇게 후드려 패듯이 하면 어떻게 해. 일단 다시 연결시켜야 할 거 아니야. "
"저 분 또 시작이네. 왜 저렇게 테린이에게 뭐라고 하지. "
파이썬 클럽 최고 고수인 장영환 아저씨였다. 이 분은 우리 테린이 대회 때에도 재민이와 수진, 진아 누나처럼 본선 진출한 사람들만 칭찬하고 나랑 재현이 형에게는 계속 냉랭했었다.
클럽의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래도 우리 클럽에서 두 명밖에 없는 오픈부여서 자부심도 엄청나고, 테니스도 레슨을 받은게 아니라 클럽에서 배우면서 독학해서 신인부에서 우승을 한 거라서, 실력을 늘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독 잔소리가 심하다고 했다.
당시 나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신인부 우승이 그렇게 대단한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신인부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사람은 다 신인이라는 얘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1년짜리도 신인이고, 5년 쳐도 신인, 15년 쳐도 전국대회 우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국대회에는 신인으로 참가하는 거였고, 예전에는 테린이 대회 같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모든 구력자들이 참가하는 말만 신인인 고인물들의 대회였다고 한다.
그런 대회에서 레슨도 안 받고 독학으로 연습해서 신인부 우승까지 한 점은 리스펙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왜 저랑 재현이 형만 달달 볶으시나요 라고 생각할 때,
"저도 못 치고 싶어서 치는 게 아니잖아요! 자꾸 그러시니까 제가 더 못치는 거에요! "
갑자기 코트에 정적이 찾아왔다. 보통 저 아저씨가 타박하면 나랑 재현이 형은 죄송합니다 하면 그냥 넘어가는 거였는데 재현이 형이 터뜨려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테니스판 특히 다양한 연령대가 있는 클럽에서 이런 코트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는 갈등은 터부시 되는 일이었다.
"어. 누나. 저기 조금 분위기 애매한데요. "
"야. 애매한 정도가 아니다. 지금 너 빨리 재현이 오빠한테 가서 딴 데 데리고 가. 나는 재헌 오빠랑 가서 영환 아저씨 떼놓을께. 빨리 움직여. 더 놔두면 진짜 큰 일 난다. "
나랑 진아 누나는 급박하게 움직였고, 코트 내에서 다른 사람들도 2번 코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트내에서 싸움은 최악의 경우 양 쪽 모두 회원 탈퇴로 결론날 수도 있기 때문에 둘을 떼어놓는게 급선무였다.
고수 아저씨는 지금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재현이 형을 노려보고 있었고, 재현이 형도 혼자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잘 하라고 말하는 거잖아. "
"아 형님. 그만해요. 이쪽으로 와요. 재현이 너도 잠깐 저쪽으로 가 있고. "
클럽의 총무인 재헌이 형이 금새 코트로 와서 영환 아저씨를 딴 데로 데려가고 있었다. 재현이 형과 이름은 비슷하지만 클럽 내 두 명 밖에 없는 오픈부 중 한 명이었다. 뛰어난 실력에 친절함까지 갖춘 고수로 테린이 4인방이 가장 좋아하는 클럽 분이시기도 하다.
나도 재현이 형에게 빨리 가서 형의 팔을 잡고 코트 밖으로 데리고 갔다.
"형 왜 그러셨어요. 갑자기. 즐테한다면서요. 저 분 하루 이틀도 아닌데. "
"... "
재현이 형은 말이 없었다. 그냥 입술을 꽉 깨물고 굉장히 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때 회장님과 다른 분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난 재현이 형이 클럽에서 나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세 분이 오셨는데 회장님과, 총무인 재헌이 형, 그리고 진아누나였다.
"재현아. 오늘은 운동 그만하고 들어가는 건 어떻겠니? 나중에 얘기하는 걸로 하고. "
"그래요 오빠. 우리가 오빠 짐도 챙겨 왔어요. 준경아 이거 받아. 재현이 형이랑 집에 가는 길 좀 같이 다녀와 "
"네 회장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
"그래 오늘은 먼저 들어가는데 이번 일은 우리 다시 얘기하자. "
재현이 형의 짐을 들고 재현이 형이 걸어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바로 옆에 서있는 것도 조금 어색해서 약간 뒤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 옆은 동네 작은 공원이 있어서 가벼운 일상복을 입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 테니스 운동복을 하고 장비를 어깨에 걸치고 가는 남자들은 약간 그림이 안 맞는 거 같다라는 생각을 할 때 재현이 형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나 진짜 그냥 즐테하려고 했어. 이제 테니스에 스트레스 안 받고. "
"형. 그 때. 그"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형은 혼자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듣거나 같이 대화상대를 해주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테니스 때문에 여자친구랑도 싸우고, 회사 지원하는 것도 살짝 내려놓고 정말 열심히 하는데 그 한 번을 못 이기네. 근데 생각해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같기도 하더라. 내가 20~30대 처럼 몸이 날라다닐 때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말한 것처럼 테수저도 아닌데. 뭐 어쩌겠어. 동네에서 그냥 테린이보다 조금 더 잘치는 아저씨가 되는 거지. "
뭐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여기서 내가 말하면 더 자존심 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형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그냥 묵묵히 발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게임 하는데 저 아저씨가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는 거야. 저 놈 리턴해봤자 결국 전위에게 걸려서 포인트 잃을텐데. 내가 뭐하러 열심히 하나. "
기억난다. 그 분의 그 표정. 얼굴 표정에 감정이 잘 드러나는 편이라 같이 파트너 하는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가 많다. 클럽에 오래 계신 분들은 멘탈이 좋아지셔서 그러려니 하지만 테린이 4인방은 그 분과 페어가 되면 멘탈이 가루가 될 때 많았지.
"그런데 그 표정에서 누가 보였는지 알아? "
"누구요? "
"여자친구 표정. 나 회사 나오고 나서부터 언젠가 지원이가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거든. 일단 버텨보라고 30대 후반 아니 진짜 내년에 마흔인데 어딜 가냐고 있는데서 버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회사를 나간 나를 저런 표정으로 보고 있거든. "
연애도 거의 해보지 않았지만 여기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하면 안 되는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나한테 말을 하는게 아니라 자신한테 혼잣말, 회사를 나가고 나서 금방 재취업될거라 믿고 있었던 자신, 영어처럼 테니스가 금방 늘 거라고 믿었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냅다 후렸어. 다운더 라인으로. 회사도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갔는데 여기서 리턴도 내 마음대로 하나 못하겠어 그 생각으로. 공이 또 나가더라고.
그러니까 혀를 차면서 나 들으라고 한 건지 모르지만 혼잣말로 꽤 크게 나아진게 없네 에휴 이러는데 그 말이 지원이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오빠는 나아진게 없구나. 그 때 속에서 뭐가 막 올라오더라고. 그래서 나도 한 마디 한 거지. 테니스 못 치면 못 치는 거지. 못 치는 걸로 무시까지 받아야 하냐. "
"형 그래서 갑자기 소리를. "
"맞아. 사실 그 영환 아저씨한테 한 게 아니라, 지원이 아니 그냥 나한테 얘기한 거 같애. 내가 요새 되는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눌려 살고, 그래서 더 공도 안 맞는거 같고. "
"형 F에요? "
"너 MBTI 말하는 거지? 나 그거 잘 안 믿어. 지원이는 나 T라고 하는데 너는 나보고 F라고 하고, 회사에서는 J라고 하는데, 집에서는 P라고 하고. 근데 그게 뭐 중요하나. 이제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게 중요하지. 아 테니스 서럽다 서러워. "
"그건 맞아요 형. 테니스가 서러운 운동 맞는 거 같아요. 다른 클럽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우리 얼마전 다녀왔던 그 바이브 클럽 봐. 거기는 실수해도 으쌰으쌰 해주잖아. 그러니까 평소 안 되던 것도 되고. 우리 그 쪽으로 옮길까? "
"형 거기도 잘 하는 사람 받아줄 거에요. 굳이 우리를. "
말해놓고 보니 테니스는 정말 서러운 운동이 맞네. 이 서러움을 견뎌야 실력이 는다고. 2~5년차가 가장 서러움 많이 받고 힘들 시기라고 하더니. 누가 그랬나. 테린이 다음은 테춘기라서 질풍노도의 시기니 멘탈을 잘 괸리해야 한다고.
"준경아. 이렇게 마음 속에 있는 말 털어놓으니 후련하다. 사실 너 혼복 예선 통과한 거 앱으로 봤을 때 너무 부러웠어. 그리고 나랑 파트너 안 하니까 저렇게 본선 가는구나 생각했어. 그래 난 대회 나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고. "
"아 그래서 그 날 술먹자고 부른 거였군요. 난 진짜 축하해줄라고 부르는 줄 알았는 데 가서 좀 그랬어요 형. "
"미안하다. 오늘 이렇게 말하니까 다시 테니스가 치고 싶어지는 거 같기는 해. "
재현이 형은 그래도 대회를 나간다는 이야기는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 내뱉은 말이 있으니 바로 그 말을 되돌리기엔 좀 민망한 가 보다. 형이 다시 기운을 차린 것만으로도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형. 그래도. "
"그래. 수습은 해야겠지. 있다가 회장님께 전화 드리고, 모레 코트 나가서 사과드리고 해야겠지. 안 쫓겨 날려면. "
"맞아요. 그 분 때매 다 불편해도 형이 먼저 사과 드려야 또 분위기가 좋게좋게 될 거 같아요. 형 알잖아요. 아 진짜 말하고 보니 이거 무슨 회사랑 똑같네. 테니스 치러 우리가 모였지 회사처럼 할려고 뭐였나. "
"다른 운동도 다 비슷할 거야 아마. 어쩌겠냐. 테수저가 아닌 우리가 이 감내해야 할 테춘기의 시절을. "
"형 그래도 기분이 풀렸나봐요. 하하하. 잘 들어가고 코트에서 다시 뵈요. "
"그래. 너도 그 혼복 파트너에게 정말 감사히 생각하고. 그 때 수진이 말로는 너 에러가 대부분이었다는 데 파트너는 계속 화이팅만 해줬다면서. 근데 너 수진이야? 그 분이야? 하하하"
"아 뭔소리에요! 빨리 들어가요. "
그렇게 공원의 가로등 빛은 두 테린이들을 토닥토닥 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