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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여행을 떠납니다

출발 전

자고 일어나면 여행을 떠납니다. 아주 오랜만에 떠나는 거예요. 원래 여행 전날엔 늘 두근거림과 기대에 부풀어 즐거운 상상을 하느라 잠을 설치는데, 이번엔 걱정과 근심이 더 크네요.

결혼 전엔 엄마아빠랑 트렁크 하나씩 들고 매년 한두 달씩 여행을 떠났어요. 네팔에서 트래킹도 하고 태국에서 하루에 세 번씩 마사지도 받고요.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이며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리다 파밀리아며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며 구경도 하고요. 포르투갈에서 에그타르트를 먹고 독일에서 소시지에 맥주를 마셨어요. 온 세상을 제 집처럼 쏘다니며 살았는데요.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에 코로나까지 터지고 나니, 여행은커녕 집 밖에 나서기도 쉽지 않더라고요요. 그런 와중에 맞이한 남편의 십 년 휴가가 어찌나 귀했는지 몰라요. 코로나가 좀 잠잠해질 때까지 미루고 미루면서 호심탐탐 떠날 준비를 하다,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된 거랍니다.


어디 갈지 고민이 참 많았는데, 우리의 작은 인간 민이에게 여행지를 맞추다 보니 결국 십 년 전 엄마아빠와 제 여행의 원점이었던 크로아티아를 다시 가게 되었답니다. 자연이 아름답고 치안이 좋으면서 수민이와 다니기 좋은 몇 군데 후보지 중에 수민이가 사진을 보고 직접 골랐어요. 바다가 마음에 쏙 들었다나요.

우선 푸른 바다 아래 붉은 지붕이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로 향해서 플리트비체와 로비니, 풀라, 리예카 등 크로아티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둘러보고 올 계획이랍니다. 십 년 전보다 동선은 줄고 인원은 늘어서 제약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지만 그래도 함께 떠나니 좋은 거, 맞겠죠?


그나저나 민이의 첫 비행이 걱정이네요. 떼가 잦거나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는 아니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고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잘 견딜 수 있을지... 혹여 비행기에서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여행 가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음식은 입에 맞을까 등등 고민에 고민이 이어집니다. 

그에 더해서, 엄마아빠와 남편과 아이와 저 이 다섯 식구가 여행을 마치고도 지금처럼 좋은 사이로 지낼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물론 결혼 7년 차인 지금까지는 너무 화목하게 잘 지냈어요. 고맙게도 남편이 매년 엄마아빠와 함께 휴가도 가고, 근처에 사시면서 일주일에 반은 왕래하며 지내는 덕에 평소에도 가까운 사이긴 하지만요. 이렇게 긴 시간 낯선 환경에서 밀착된 상태로 함께 지내다 보면 서로 불편한 감정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어서요.

네, 맞습니다. 저는 담도 작고, 걱정도 많고, J형 인간이라 그래요. 그러거나 말거나 두 인간-남편과 아이-은 옆에서 코를 골며 맘 편히 자고 있네요.

심란함을 없애려 마음속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어요. 짐은 거의 챙겼고, 내일 할 일은 미리 적어두었고, 쓰레기도 처리했고, 냉장고 음식들도 정리했고… 설레서인지 생각이 많아서인지 그래도 잠이 안 오길래, 내친김에 침대 옆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어요. 메일 폴더에 저장된 비행기 티켓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현지 공항에서 만나기로 예약한 택시도 확인하고요. 두브로브니크에서 머물 에어비앤비 예약도 확인합니다.


비행기 출발은 29일. 그래서 에어비앤비 예약도 29일. 기사님도 29일에 공항에서 만나기. 좋았어!

잠깐! 비행기 출발이 29일은 맞는데 도착이... +1일이니까 29 더하기 1은 30. 30일이네요. 근데 저는 왜 숙소를 29일부 예약했을까요? 네? 맙소사! 이런 초보자도 안 하는 실수를 베테랑 트래블러인 제가 해냈답니다. 와, 돈… 일단 돈이 이게 하…

아닙니다. 지금 돈을 따질 때가 아니에요. 일단 문제 수습이 먼저지요. 혹시나 싶어 환불 규정을 열어봤지만 될 리가 없겠죠. 뭐, 보는 건 괜찮잖아요. 돈 드는 거 아니잖아요. 제가 확인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엉엉.

당장 호스트가 오늘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릴 텐데 큰일이네요. 그것보다 택시 기사가 공항에 나와 있을 텐데 이걸 어쩌죠? 하지만 다행히 저에겐 시차라는 무기가 남아있었지요. 크로아티아는 아직 전날 오후 세 시쯤이더라고요. 그래서 급히 메시지로 사정을 설명하고 내일 도착하니 약속을 내일로 미루자고 얘기했어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소주를 한 병 깔 뻔했답니다. 나는 뭐지, 바보인가, 어쩜 그리 당당하게 예약을 하고 확인을 한 거지. 눈이 삔 건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몇 달 동안 준비했는데 그동안 어찌 한 점의 문제의식도 없었단 말인가. 오만 자책을 하고 또 하다 두 시간이 지날 즈음 호스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No Problem!”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이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감격을 하는지요. 따지고 보면 프라블럼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제 마음은 프라블럼으로 가득하지만, 일단 그쪽은 프라블럼이 아니라니 땡큐 베리 마치합니다.


일단 발등의 불을 끄고 나니 이 사실을 다른 가족과 공유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더군요.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습니다. 밝혀지는 순간, 그때부터 여행 끝나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 구박과 질타와 질책이 이어지겠지요. 호되게 혼나고 놀림감이 되고 툭하면 조롱을 받을 겁니다. 저희 집은 그런 면에선 정글과 같거든요.

엄마와 아빠는요. 제가 스무 살 때 통금을 어기고 12시까지 술을 먹은 실로 손에 꼽을 그 몇 번을, 매번 자정을 넘기고 술을 마시던 난봉꾼처럼 이야기하시는, 그야말로 과장과 확대의 천재랍니다. 엄마아빠에겐 반드시 이 실수를 묻어둬야 해요. 자칫하면 지금까지 이 여행에서 준비한 모든 저의 잘한 일은 잊히고, 한순간에 트러블메이커로 전락해 버릴지도 몰라요.

아, 그러나… 그에게는 걸렸습니다. 걸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잘 수습되어 다행이라는 말을 먼저 전함과 동시에, ‘그래서 이걸 묻어두는 대가로 넌 뭘 해줄 거냐’는 딜을 바로 해오더군요.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 했는데, 그를 동지라 생각했던 한때의 어리석은 저를 탓할 수밖에요. 어쨌든 여행 시작도 전에 지쳐버렸습니다. 그냥 집에 있을까 봐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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