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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빨간 지붕 위를 걷다

두브로브니크

전날 일찍 곯아떨어진 덕분인지 여섯 시 반에 다들 일어났어요. 아직 비몽사몽 정신없는 가운데 씻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펑’!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났어요.

다들 번개처럼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가 무슨 일인지 살피는데, 범인은 아빠였네요. 세상에, 삶은 계란이 너무 차가워 데운다는 걸 전자레인지로 폭발시키고 말았어요. 그 상황을 보자마자 전, ‘매일 삶은 계란을 드시고, 매일 계란을 데우시는 데, 왜 이런 일이?’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 생각에 잠겨 멈춰버린 저와, 멍하니 터진 계란을 바라보는 아빠. 그 옆에서 그걸 왜 똑바로 안 보고 터뜨리냐며 계란보다 큰 울분을 터뜨리는 엄마와, 할아버지가 계란 터뜨렸다고 개다리춤을 추는 민이. 그리고 조용히 치우는 남편. 사위, 자네가 참 고생이 많네. 우리 남편 참 좋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파란만장하고 계란 비린내 넘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민이와 저, 셋이서만 성벽투어에 나섰어요. 엄마아빠는 예전에 이미 하신 데다, 오늘은 셋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권하셨지요. 솔직히 저도 경험이 있는 바, 남편과 민이 두 부녀가 다정한 시간을 가지도록 양보하고 싶었는데요. 정신 차려보니 남편과 민이에게 양 손목이 수갑처럼 잡혀 끌려가고 있었답니다.


성벽 투어는 낮에 가면 모자를 써도 정수리가 타고, 선글라스를 껴도 눈이 머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아침 일찍 오픈하자마자 가시길 추천합니다. 인터넷 검색하면 잘 나와 있으니 방향 맞춰 해 뜨는 곳을 등지고 걷는 게 좋아요. 그리고 성벽은 전체 길이 1,940m에 높이는 25m에 달해요. 꽤나 걸으니 신발은 편한 걸로 신으시고, 중간중간 카페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물 한 병 챙겨가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크로아티아 여행 첫날이니, 우리 민이를 유럽 공주처럼 입혀서 나가 봅니다. 다행히 민이는 저랑 여러모로 취향이 맞아서, 제가 괜찮아하는 옷을 좋아하며 잘 입어줘요. 이것도 몇 년 안 남았겠죠? 알록달록 작은 인간에서 흑백 사춘기 인간이 되는 날이 오면 눈물 나지 싶어요.


한산한 거리를 걸어 성벽 입구에서 표를 사고 드디어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오르면 두브로브니크의 빠알간 지붕과 맑은 하늘, 저 멀리 푸른 바다와 건물 사이사이에 널린 알록달록한 빨래들이 한 걸음마다 각도를 바꿔가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요. 이 아름다움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네요. 사진을 찍어도 찍어도 같은 듯 다른 매력이 담기기에 수천 장을 찍게 돼요. 보면 볼수록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해 줍니다.

두브로브니크에 오시면 성벽은 꼭 보시길 강력 추천드려요. 오래 걷긴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계속 감동하느라 질릴 틈이 없으실 거예요.



하지만… 아이가 있다면 이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여섯 살 아이에게는 내가 보는 풍경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말입니다. 전 몰랐어요. 민이가 자꾸 재미없다길래, 투정이 잦은 애가 아닌데 왜 이럴까 싶었지요. 이상하다 싶어 쭈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더니, 글쎄 민이 눈에는 딱 벽만 보이더라고요. 성벽의 높이가 아이 눈보다 높아서 민이 눈에는 회색만 보이니 금세 싫증이 났나 봐요. 결국 아이는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누가 나 좀 목마 태워주면 좋겠다.”

누굴까, 그 누구가? 나는 아닌데? 누구지? 남편, 당신은 그게 누구라고 생각해? 나는 그게 너라고 생각해.

그리하여 결국 아빠의 목 위에 올라탄 민이. 성벽을 시작으로, 여행 내내 이곳저곳을 18킬로짜리 아이를 목에 올리고 다닌 남편을 보면 참 안쓰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안겨주고 같이 다니고 손 잡아줘서 민이에게 고마워요. 조금 있으면 동네 슈퍼도 같이 안 가려고 한다는데. 그때 당신의 휘어진 목을 보며 지금의 행복을 기억할게, 남편.



아, 그런데 목마를 태우니 또 너무 높아서 무섭다고 울더군요. 성벽 아래가 바로 바다라 그런지, 떨어질까 봐 겁이 났나 봐요. 덕분에 아빠 목을 졸랐다가 머리를 뽑았다가. 머리는 안, 안 돼! 엄마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머리는 곤란하다고. 다행히 남편 머리가 다 뽑히기 전에 카페를 발견해서 들어갔습니다.

십 년 전엔 부자(Buza) 카페밖에 없었는데 그 사이 성벽에 카페가 제법 생겼네요. 비타민도 충전할 겸 오렌지 주스를 마셨어요. 민이에게,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다니면서 이런 데서 뭘 마신 적이 없어. 맨날 참으라 그러고 계속 걸었다니까. 넌 복 받았다, 진짜'라고 얘기했는데요. 애는 듣는 둥 마는 둥 오직 관심은 주스뿐이었던 민이랍니다.


투어를 마치고 내려오니 거리에 작은 시장이 섰길래, 과일과 야채와 계란을 사서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엄마아빠가 집에 안 계신 거예요. 저희가 전날 여행책 보고 여기 어떨까 하고 한 번 말했을 뿐인 식당을, 두 분이 미리 찾아가 보신 거죠. 혹시 나중에 애까지 데리고 가다가 잘 못 찾고 헤매지는 않을까, 오늘 쉬거나 예약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저희 없는 사이에 알아보러 가셨더라고요.

솔직히 남편이나 저나 여행지에서 꼭 뭘 먹어야 하고 사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가봐서 기다리면 딴 데 가고, 못 하면 말고, 관광도 좋지만 천천히 골목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거든요. 그런데 엄마아빠는 이런 걸 이해 못 하세요. 가서 맛있다고 하면 먹어봐야 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나 유명한 곳은 꼭 보셔야 하고요. 미리 조사하고 계획해서 실행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탈 때 엄마아빠는 게이트 열리기도 전에 줄 서 있는 스타일이세요. 저희 남편은 사람들 다 타고 맨 마지막에 천천히 들어가는 스타일이고요. 저요? 저는 그냥 대충 중간에 흐름 따라 들어갑니다. 아주 유연한 사람이죠.

서로 이렇게 달라요. 그러니 남편 입장에서는 식당에 미리 가보신 엄마아빠가 이해도 잘 안 되고요. 아이를 케어하면서 땡볕에 엄마아빠랑 만나려다 헤매니 짜증도 나고요. 그런 게 겹쳐져서 살짝 저와 언쟁이 있었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가운데서 눈치도 보이고, 여행 시작하는데 이런 균열이 생기면 앞으로 어쩌나 미리 걱정돼서 더 예민해지기도 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또 빨리빨리 민족이라, 화 푸는 것도 빨리빨리 풀지 않았겠습니까.



온갖 고생 끝에 엄마아빠와 만나 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침대에 누우니, 어머. 침대가 저를 꼭 끌어안고 놓지 않네요. 놔라, 이놈 했는데 침대가 넌 지금 나갈 때가 아니라고 저에게 속삭여주었어요. 저는 그런 침대를 내치지 못하고 잠시 침대 품에 안겨 있었지요. 그런 저를 남은 네 식구가 어이없게 바라보는 걸 못 느낀 건 아니지만, 비루한 체력을 이렇게나마 보충해야 했답니다. 잠시 잠의 세계로, 안녕.


달콤한 낮잠 후 점심을 먹으러 나섰어요. 그래요, 지금까지 오전이었답니다. 우리의 행선지는 레이디 피피(Lady Pi-pi). 여행 책자에 소개된 식당 중 남편이 마음에 들어 한 곳이에요.



엄마아빠는, 본인들은 이미 한 번 왔던 곳이니 이번에는 가능하면 사위에게 좋은 경험을 많이 선물해주고 싶어 하셨어요. 물론 그게 때로는 너무 강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의욕이 앞서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번 여행에서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결정을 가른 건 남편이 컸지요. 그리고 남편이 그런 엄마아빠께 많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엄마아빠도 남편도 서로의 마음을 반은 알고 반은 몰라요. 저만 다 알죠. 끼인 자니까.


레이디 피피는 구시가지에서 가려면 계단을 엄청 올라야 하지만, 다행히 저희 숙소 있는데서는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내부에 대기할 곳이 없어서 기다리려면 밖에서 서 있어야 하는데, 저희 갔을 때 자리가 딱 맞게 한 자리 남아서 기다림 없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답니다. 실외 식당이지만 나무 덩굴이 머리 위를 가려서 실내외 장점을 모두 누릴 수 있고요,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와 꽃들이 크로아티아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곳이에요. 분위기는 물론이고 음식도 맛있어서 모두 남기지 않고 배불리 먹었어요.



아침부터 강행군을 해서 지친 민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길에 우리의 사랑 젤라토를 또 먹었어요. 오늘은 눈에 봐두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를 먹었는데 아뿔싸, 이름만 멋있었네요. 모차르트는 듣는 거지 먹는 게 아니었어요. 역시 저에게는 초코가 최곱니다. 민이도 초코가 최곱니다. 오늘은 맛이 별로라 민이랑 나눠먹지 않아도 되었어요. 조금도 기쁘지 않네요.

아, 장을 봐서 집에 가는 길에 남편이 비둘기 똥을 맞았습니다. 아까 살짝 다퉜을 때 건 저주를 걸었는데 바로 이렇게 효과가 나타나네요.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라, 남편놈아. 길 가다가 비둘기 똥 백 번 맞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똥 맞은 등짝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서. 집에 가서 깨끗이 빨아줘야겠네요.


저녁은 우리의 핫스폿인 베란다에서 먹었어요. 바람도 좋고 기분도 좋고 상쾌하고 행복하고 최고네요. 모두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 민이는 심지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네요. 자연인이 따로 없어요. 밥 먹고 혼자 7시에 이빨을 닦더니 조용히 침대에서 잠들었어요. 애들은 역시 신나게 놀게 해야 하나 봐요. 그럼 잘 먹고 잘 싸고 잘 잡니다.

덕분에 어른들 모두 여유 있게 하루를 돌아보며 잠이 드네요.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였어요. 감사합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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