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기대하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트래킹 날입니다.
십 년 전에도 워낙 좋았고, 아직까지도 엄마아빠와 제 마음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 곳인데요. 과연 남편과 민이의 눈에는 이곳이 어떻게 담길지 걱정 반 기대반으로 아침을 시작했어요.
더우면 걷는 게 더 힘드니 아침 일찍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으로 향했어요. 어제 비가 내리고 흐려서 걱정했는데 오늘은 감사하게도 날이 아주 맑았어요. 비가 온 후라 그런지 초록빛 물이 가득, 풀잎도 풍성.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지요. 십 년 전에 왔을 때 천국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면 이런 모습이구나 감탄하게 되더라고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92 km² 나 되는 광활한 숲이에요. 그 안에 크고 작은 16개의 호수가 계단식으로 흩어져 있고, 그들을 92개의 폭포가 연결하고 있지요. 석회질 퇴적물로 인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는데요. 미네랄과 유기물 함유 농도, 햇빛의 각도 등에 따라 에메랄드그린이나 코발트블루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빛이 숲의 녹색과 어우러지며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내요. 거기에 하얀 물안개를 일으키며 흘러내리는 폭포가 생동감을 더합니다.
보통 여름에서 가을이 가장 멋진 시기라 알려져 있지만, 봄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겨울에는 눈과 얼음으로 수놓아져 모든 계절이 저마다의 절경을 뽐낸답니다. 각종 나무와 풀들로 덮인 공원에는 다양한 동물과 물고기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해요.
공원을 트래킹 할 때는 생태계 훼손 없이 정비된 하이킹 코스가 여러 개 준비되어 있어서,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어요. 공원 안에는 식당이나 매점이 없기 때문에 간단한 먹거리와 물을 챙겨가시길 권합니다. 저희는 가장 인기 있는 H코스를 선택했는데요,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요. 민이가 끝까지 힘내주기를, 그보다 제 비루한 체력이 잘 버텨주기를 바라며 트래킹을 시작했어요.
너무 쨍하지 않은 햇살이 나뭇잎 위로 가득하고, 나무 사이로 바람이 살랑거렸어요. 비 온 후라 풍성한 물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나무다리를 지날 때면 발에 닿을 듯 넘실거립니다. 요정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거짓은 아닐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작은 요정 민이가 잠시 들르러 왔지요.
민이는 네 시간이 넘는 트래킹을 불평 없이 잘도 해내줬어요. 물론 중간중간 남편이 목마를 태워줬어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민이는 이렇게 자연에 둘러싸인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마냥 신기한가 봐요. 자그만 발로 찰방찰방 물다리도 건너고, 수많은 폭포와 물고기도 보며 내내 우와, 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이 모든 걸 다 기억할 순 없겠죠. 그래도 민이 마음속에 초록빛 행복이 늘 찰랑찰랑 반짝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남편과 아이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저를 뒤에서 웃으며 바라보는 엄마아빠. 걸으면서 마냥 즐겁기만 했던 건 제 뒤를 든든히 지켜주고 계신 부모님 덕분임을 알지요. 더 잘해야 하는데, 제 자식 챙기기만 바쁜 것 같아 늘 죄송해요. 십 년 후에도 우리 또 함께 이곳을 걸을 수 있기를. 엄마아빠가 천년만년 제 곁에 있어주시기를, 못난 딸은 욕심부려 봅니다.
정말 많은 풍경을 마음에 담아 가지만,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휠체어를 끌고 온 사람이었어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길을 냈기 때문에 걸어서 다니는 것도 가끔 어려운 곳이 있는데요. 휠체어에 앉은 사람도 휠체어를 끄는 사람도 앞으로 나아가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전혀 짜증 나거나 힘든 표정이 아니었어요. 한 곳도 놓치지 않고, 길이 험하고 울퉁불퉁해도 끝내 가시더라고요.
걸어서 이곳을 다 보고 가는 사람들처럼, 품이 조금 들더라도 시간이 들어도 보겠다는 담담한 의지가 멋있었어요. 뒤에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저도, 덕분에 플리트비체의 바람과 나무와 그 사이 틈의 모양새를 더 자세히 눈에 새길 수 있어 정말 감사했어요.
트래킹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근데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삼십 분 넘게 걸렸어요. 트래킹 본판보다 이게 더 힘들었다니까요. 내내 묵묵히 따라주던 민이도 차에는 언제 도착하냐고 슬슬 구시렁 대기 시작했지요.
아이를 달래며 걸어가는데 진짜 갓 태어난 듯 작은 신생아를 데리고 가는 부부를 보았어요. 대단하기도 하고 눈을 끔뻑 거리며 잘 안겨 있는 아이를 보니 귀엽기도 하고요. 민이보다 더 어린애들을 여럿씩 데리고 다니는 부모들을 보니,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나약한 어미가 되지 않기 위해 민이 손을 꼭 잡고 씩씩하게 다시 걸어갔어요.
오늘의 일정은 이렇게 끝이 났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갔는데,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지 문구류가 가득했어요. 하지만 어째서 민이가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치는 색종이만 없는 걸까요? 여긴 왜 색종이를 안 쓰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따지고 들자면 색종이를 안 챙겨 온 이 못난 어미 탓이겠지요. 크레파스며 도화지며 장난감이며 다 챙겨놓고 왜 색종이는 안 챙긴 거냐. 나란 녀석.
색종이로 쓰라린 가슴을 안고 집에 와 상을 차리는데, 엄마가 두 가지 사고를 치셨습니다. 우선, 양상추를 샀는데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었어요. 덕분에 양상추 전멸… 그리고 두 번째로, 양상추 속에 살던 달팽이에게 화상을 입혔지요. 물론 고의는 아니었지만, 민이는 달팽이를 발견하고 할머니가 달팽이 아프게 했다고 난리난리. 남편이 달려와 겨우 살린 덕에 엄마도 한숨 돌리셨지요. 민이는 지금까지도 할머니가 달팽이를 죽일 뻔했던 일을 이야기해요. 죽일 뻔해서 다행이지 죽었으면, 어휴.
자잘한 사건과 사고 끝에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며 와인도 한 잔 마셨어요. 우리 민이는 된장국과 계란 프라이만 있으면 정말 밥 한 그릇을 다 먹는 아이라는 걸 새삼 깨닫네요. 잘 먹어줘서 참 고마워요.
이번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끼리 돈독한 시간을 보내는 데 의의를 두고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저희는 평소에도 자주 뭉쳐서 찐하게 시간을 보내긴 합니다. 내내 붙어 지내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얘기도 많이 하죠.
그러니 서로에 대해 새로 발견할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남편은 아니었나 봐요. 예를 들면, 엄마가 큰 소리로 당연하다 주장하는 것 중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 아빠가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것 중 아닌 것들이 엄청 많다는 것. 이 바닥에서 하는 말 대충 넘기면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나 봅니다.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과 행복으로 가득한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오늘도 감사한 게 너무 많아요. 감사합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