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니 그리고 풀라
오늘은 로비니에 가는 날이에요. 십 년 전에 가려고 했는데, 입구를 못 찾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맸지요. 당시 저희의 모토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눈 뜨면 새로운 곳으로 간다, 돌아가지 않는다’였고, 결국 로비니를 지나쳐가 버린 저희였지요.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모토가 잘 통했는데, 로비니는 유일한 실수로 남고 말았요. 다녀와서 보니 로비니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다녀온 사람마다 입을 모으더군요.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꼭 로비니를 가보자 결심했어요.
원래는 로비니에서 며칠 머물며 주변 도시도 둘러보려 했는데 숙소가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요.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좋은 숙소가 없다는 게 아니라 이미 예약이 다 차거나 저희가 생각한 조건에 맞는 곳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결국 풀라에서 머물며 당일치기로 가는 걸로 계획을 바꿨네요.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무리를 해서라도 로비니에서 잤어야 해요. 직접 보니 듣던 것보다 상상한 것보다 훨씬 로비니가 참 사랑스럽고 예쁜 도시더라고요.
최근 유럽 내에서 로비니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그레브나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나 플리트비체에 버금가는 크로아티아의 인기 관광지가 되고 있다고 해요. 치안도 좋아서 가족 단위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고요. 피서 기간에는 한 달 단위로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도 많대요.
로비니는 약 500년간 베네치아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이나 집과 건물의 양식이 어딘가 베네치아를 느끼게 해요. 항구도시라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를 곁에서 바로 볼 수 있고요. 바다와 함께 비치는 사랑스러운 로비니 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몇 시간이라도 그 자리에 머물게 할 만큼 매력이 넘칩니다.
9시에 로빈에 도착해서 일단 젤라토 가게에 들렀어요. 달콤한 젤라토를 먹으며 천천히 걸어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성유페미아 성당까지 올랐어요. 도착하니 걷기에 지친 사람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어요.
1725년에 기존의 성당을 허물고 개축된 성유페미아 성당에는 성녀 유페미아의 관이 안치되어 있대요. 저는 성당의 내부보다 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로비니의 모습이 끝내주더라고요. 로비니의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조금 올라가야 하지만, 로비니 자체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힘내면 금방 오를 수 있어요. 지칠 것 같으면 미리 젤라토를 사서 먹으며 올라가세요. 그럼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예요.
성당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오며 구경을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그림과 엽서, 로비니의 특색이 담긴 수공예 작품들이 가득해서 하나하나 구경하다 로비니에 뼈를 묻을 뻔했지요. 크기는 작지만 지형을 잘 살린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저마다의 매력이 가득해서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한답니다.
로비니는 투명한 아드리아해와 바로 옆에 맞닿아있거든요. 그래서 골목 끝으로 걸어가면 바닷물이 발 밑으로 찰랑찰랑, 비현실적이고 요술 같은 풍경이 펼쳐집니다. 가게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으면 그림 같은 테라스로도 변신해요. 어디를 가도 예쁘고 무엇을 찍어도 예술이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어요.
열심히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어요. 맛있다는 식당을 찾아갔는데 음식은 그냥 보통이었어요. 그런데 아빠가 드시려던 리소토에서 플라스틱이 나온 거예요.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다시 조리하느라 시간이 걸려 조금 아쉬웠지요.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날려버릴 만큼 멋진 카페를 발견했지 뭐예요. 지도에서 평이 너무 좋길래 네비를 켜서 겨우 찾아간 곳이었는데요. 특색 있고 독특하고 힙하고 멋있고 다 했어요. 맛있고 친절하고요. 가족 모두 두 손으로 따봉을 흔들었답니다. 다시 로비니에 간다면 꼭 다시 가보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며칠 머물며 매일 모닝커피를 마시고, 애프터눈 티를 마신 후 나이트 주스까지 마시고 싶은 곳입니다. 혹시 로비니에 가신다면 진짜 꼭 가시길 추천드려요.
이제 슬슬 집에 가려는데 민이가 기념품 가게에서 인형과 팝업 가방을 사고 싶다고 졸랐어요. 어지간하면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저희 옆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엄마는 그런 소비를 굉장히 싫어하셔서 살 수가 없었지요. 아니, 솔직히 사주려면 사줄 수 있었는데요. 엄마 핑계로 안 사준 거예요. 만듦새가 조잡한데 비해 너무 비싸서 마음이 안 내키더라고요.
대신 남편이 민이를 데리고 젤리가게에 들어갔어요. 젤리와 사탕으로 가득 찬 공간에 있으니 민이는 행복해서 어쩔 줄 몰랐어요. 입이 귀에 걸려서는 상어젤리, 거북이젤리, 망고젤리, 이런 젤리 저런 젤리를 가득 사고요. 얼굴이 가려질 만큼 엄청나게 큰 하트 사탕도 샀지요. 마치 전장에서 검을 하사 받은 장군처럼 가는 내내 소중히 들고 신난 민이 덕분에 저희도 행복해졌어요. 이렇게 금방 마음을 풀고 행복해질 수 있다니, 아이들의 마음이 참 부러워요.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나서 남편도 가장 좋고 기억에 남는 도시로 로비니를 꼽았답니다. 남편이 얼마나 로비니를 좋아하냐면, 스스로 나서서 로비니 기념품을 사겠다고 했을 정도예요. 여행에 가면 그냥 현지에서 잘 보고 잘 먹고 잘 놀다 오는 게 최고다 말하는 남편인데. 그런 그가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로비니였어요.
다른 곳은 몰라도 언젠가 로비니는 꼭 다시 가고 싶어요. 더 많은 골목을 걷고 밤의 로비니도 보고, 그렇게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 오고 싶은 곳이에요.
로빈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후 풀라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민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는 거예요. 세상에, 비상입니다. 엄마아빠는 천천히 오시라하고 남편과 둘이 민이를 잡고 일단 달려갔어요. 손잡고 뛰다가, 다시 안고 뛰다 보니 겨우 저 멀리 공용 화장실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무슨 화장실이 점심때까지만 영업을 하는 겁니다! 그럼 오후부터 화장실 급한 사람은 어쩌라고요!!
어쩔 수 없이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시키고 화장실에 갔어요. 뭐, 이렇게 또 커피 한 잔 하는 거겠죠. 그런데 여기 에스프레소가 끝내주게 맛있어서 놀랐답니다. 세상은 참 어찌 될지 몰라요. 결과가 좋으니 다 좋은 걸로.
겨우 민이의 화장실을 해결한 후에, 엄마아빠가 카페에서 쉬시는 동안 민이와 셋이 아레나를 구경하러 갔어요. 전날 엄마아빠가 콘서트를 봤다는 그 아레나예요. 십 년 전에 왔을 때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는데 이제는 복원이 다 됐더라고요. 들어가서 볼래 하고 물으니 남편이 고개를 저었어요.
남편과 저는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때 당연히 콜로세움을 봤거든요. 밖에서 봤을 때는 너무 멋있다며 흥분하던 남편은, 막상 안에 들어가서 보니 감흥을 밖에서보다 덜했나 봐요. 그때 이후로 모든 아레나는 그냥 밖에서 보는 걸로 충분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냥 셋이서 손잡고 천천히 아레나 밖을 한 바퀴 산책했어요.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나네요. 즐거움이 가득했던 참 좋은 하루입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