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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물의 마을을 지나서

라스토케 그리고 풀라

왜 우리는 여행만 오면 늦잠을 자지 못하는 걸까요. 6시에 다 같이 일어나 밥 먹고 짐 싸고 나니 시간이 남네요. 하지만 어제저녁 먹으며 약속한 출발 시간은 9시 반. 아, 드디어 제가 예전부터 엄마아빠와 부딪혔던 그 문제가 드디어 발생했네요. 9시 반에 출발하기로 약속했지만, 일찍 일어났으니 그냥 빨리 준비해서 떠났으면 하는 엄마아빠의 그 빨리빨리 병이 또 도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참 역사가 긴 문제인데요. 예를 들어, 9시 반이 기차 시간이고 이동 시간이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면 엄마아빠식 계산은 이렇습니다. 9시 반 기차니까 9시에는 역에 도착해야 하고, 30분 거리니까 여유롭게 이동시간을 한 시간 잡아서 집에서 8시 조금 넘어 출발하자는 식인 거죠. 이미 이 상황에서 여유는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6시쯤 일어나서 준비를 다 마치고는 7시부터 마음은 이미 밖으로 나가 있고요. 7시 반이 되면 왜 미적거리고 출발을 안 하냐고 8시에 약속 시간에 맞춰 준비하던 저를 닦달하는 거죠. 이러고 가잖아요? 한산한 기차역에서 8시부터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럴 필요를 못 느끼거든요. 물론 엄마아빠 말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건데요.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너무 과하지 않느냐 이겁니다.


뭐,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수시로 일어나는데요. 저는 워낙 담이 작고 눈치를 잘 보는 성격이라, 엄마아빠의 조급함을 느끼는 순간 서두르게 되거든요. 그러나 저의 남편,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담도 커서 눈치 따위 보지 남자거든요. 여유롭게 아침 시간을 보내고 핸드폰도 보고 조금 쉬다가요. 아주 오래오래 공들여 씻고 9시 반에 딱 맞춰 출발 준비를 마쳤답니다. 

그 사이 엄마는 계속 '유서방은? 아직이니?'를 천 번 정도 외치셨지요. 저는 아홉 시 반 출발 아니냐면서 꿍시렁 댔고, 엄마는 좀 서두르면 누가 잡아가냐고 뭐라셨고요. 그런 엄마와 저의 마음속에서는 천불이 일었지요. 성격 급한 아빠는 이미 짐을 다 차에 싣고는 마당에서 민이 그네와 해먹을 천 번 정도 밀고는요. 지도로 오늘 가는 길 파악까지 다 마치셨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여운 제 남편은 마이 페이스, 무소의 뿔처럼 자기 길을 갔어요. 나중에 슬쩍, '조금 일찍 준비했으면 했다'라고 말했는데 돌아온 건 왜냐는 물음. 맞아요, 사실 그 말이 맞죠. 

그래도 이럴 때 반대로 남편이 너무 눈치를 보거나 왜 그러시냐고 하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물론 엄마아빠가 직접 남편에게 뭐라 하시면 그야말로 파국이었겠죠. 다들 안 그러고 가운데서 저만 다잡아줘서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


오늘은 풀라로 이동을 하는데요. 그전에 고민을 하다 라스토케에 들리기로 했어요. 라스토케는 지난번 여행 때는 들르지 않았던 곳인데요. 작은 마을이니 금방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아 오전에 살짝 보고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예상외로 아침부터 유럽 쪽 관광버스가 많더라고요. 주차할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엄마아빠와 민이를 먼저 내려주고, 남편과 주차할 곳을 찾았어요. 그 사이 민이의 매력이 통했는지 유럽 아주머니들이 너무 예쁘다고 사진 찍어도 되냐고 물으셨대요. 당연히 우리 집 공주 민이는 한껏 포즈를 잡았답니다. 

여기 와서 공주병이 심해지는 것 같긴 한데요. 제 경험상 자신을 예쁘다고 생각하는 게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기에 저는 그녀의 공주병을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뭐, 누굴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을 종처럼 부리는 공주가 아니라, 그냥 내가 공주같이 귀엽구나 하는 정도면 귀엽잖아요. 



사실 전 고등학교 때 3년 동안 매해 5킬로씩 무럭무럭 자라서 헤비급으로 성장한 과거가 있답니다. 당시 식구들은 절 보고 어쩌면 좋냐고 난리였고, 간식도 못 먹게 할 만큼 걱정이 많았는데요. 하지만 막상 그때 저는 정말 행복했어요. 나중에 대학 가면 살 빠져서 지구를 흔들만한 미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고요. 솔직히 제가 살집은 있지만, 그래서 엄청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지요.

그런데 크고 나서 타인의 기준이 제 생각을 앞서다 보니, 언젠가부턴가 스스로 늘 모자라고 못났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을 못나게 여기고, 자꾸 더 빼고 더 예뻐져야 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마음에 지옥이 하나 생겼지요.

민이가 대책 없이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지 않아요. 다만, 민이가 스스로를 사랑스럽고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고 여기길 바랍니다. 우리가 그녀에게 주는 사랑이 민이 마음에 뿌리를 깊이 내려서, 누군가의 가시 섞인 말에도 상처받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고맙게도 크로아티아에서 민이는 그런 방패를 많이 얻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정하게 눈 맞추고 인사해 주고요. 넌 참 사랑스러운 아이라 말해주고요. 아이들은 그런 작지만 따스한 관심을 양분 삼아 쑥쑥 자라는 것 같아요. 이곳의 햇살과 바람과 바다, 사람들의 미소와 가족들과의 시간이 민이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번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 보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라스토케는 플리트비체에서 북으로 30킬로 정도 떨어진,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현재는 6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해요. 플리트비체가 아바타 같은 물의 정령이 살 것 같은 분위기라면, 라스토케는 엄지 마디만 한 물의 요정이 살 것 같은 마을이었어요. 동화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아기자기한 따스함이 가득했지요. 



라스토케 마을의 특징은 마을 안을 흐르고 있는 많은 폭포입니다. 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이죠. 마을 중심부 쪽은 입장료를 내고 봐야 하는데, 시간이 별로 없어 간단히 산책만 하고 돌아가기로 했지요.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이곳에서 하루 천천히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1시 반이 되어 다시 출발합니다. 한참 달리다 보니 허기가 져서 중간에 보이는 식당에 그냥 들어갔는데요. 물론 여행지에서 맛집을 찾아가 현지의 산해진미를 맛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정보가 전혀 없는 현지 식당에 무작위로 들어가는 것도 재밌어요.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영어가 안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또 그래서 더 재밌는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요. 오늘처럼 이렇게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그 기쁨은 몇 배가 되지요.

저는 입맛이 아이 입맛이어서 그런지 이곳의 크로켓이 튀김옷이 두껍고 바삭해서 엄청 맛있더라고요. 엄마아빠와 남편은 생선이 맛있었대요. 하지만 민이와 저는 둘이 초코 크레페에 더 집중했답니다. 크게 떠서 입에 넣는 데 행복이 여기구나 싶었다니까요. 그런 마흔둘의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은 그저 한심 그 자체였지만 말입니다.



자, 이제 다시 가야 할 시간. 깊은 산길을 구불구불 달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민이와 저는 멀미를 심하게 했어요. 저는 워낙 어릴 때부터 자동차, 기차, 비행기, 버스 가리지 않고 멀미가 심했어요. 그래서 차를 타면 그냥 자요. 자는 게 제일 편하거든요. 그런데 딸이 있으니 이 녀석이 계속 말을 시켜서 잘 수도 없고, 힘들다고 치대서 너무 괴로웠어요.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깨물어버렸을 텐데 자식이 뭔지요. 속이 느글거리는 와중에 아이를 열심히 달래주었어요.

사람들은 아이 낳고 자기 바닥을 본다는데 저는 아이 낳고 제 천장을 봅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고, 본능을 거슬러 아이를 돌보는 저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여러 면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저는 참 즐겁습니다. 너무 스스로 못한다고만 생각 말고, 잘하고 있는 걸 생각하다 보면 육아가 더 편해질지도 몰라요. 물론 전 너무 제가 잘하는 것만 봐서 문제지만요.  


멀미와 민이라는 두 가지 고난을 껴안고 풀라 숙소에 도착했어요. 풀라 숙소는 이번 여행 숙소 중에 가장 좋은, 무려 펜트하우스랍니다. 널찍한 풀창의 발코니에 바비큐 장비까지 갖춘, 호화로운 매력이 넘치는 곳이죠. 다들 전용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기대감이 폭발했어요.

숙소에서는 호스트 분이 저희를 맞아주셨는데, 지금까지 만난 호스트 중에 가장 열정적으로 숙소 및 도시와 여러 정보들을 설명해 주셨어요. 진심으로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지요. 저희가 십 년 전에 크로아티아 일주를 했었다고 하니 정말 기뻐하셨어요. 저도 만나 봬서 참 기뻐요, 반갑습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 엄마아빠와 저는 여행을 하면 루틴이 있는데요. 외식을 하지 않는 이상, 매일 저녁은 양상추에 연어나 햄을 얹고 타바스코 소스를 뿌려 먹으며 와인을 한 잔 하는 거지요. 딱히 한식만 고집하는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거나 잘 먹는 편도 아닌데요. 양상추와 햄, 타바스코 소스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식재료인 데다, 상큼하고 매콤하고 맛있고 배부른 저희 여행 최애 메뉴지요. 

하지만 아무리 괜찮은 음식이라도 매일 똑같은 걸 먹으면 보통은 질리기 마련이잖아요. 당연히도 남편은, 이렇게 지내다간 여행 내내 양상추에 햄만 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꼈나 봐요. 오늘은 일찌감치 바비큐를 하겠다고 선언했답니다.


근처에 마트가 많아서 장을 보기 어렵지 않았어요. 남편은 신선한 고기로 바비큐 한상을 차려냈답니다. 처음엔 바비큐 하기 힘들지 않겠냐 하시던 아빠가, 한입 드시고는 왜 고기를 이만큼만 샀냐고 하셨지 뭐예요. 맛있단 얘깁니다.

아빠는 여행 전에 크로아티아의 맛있는 와인들을 공부해 오셨어요. 그리고 그 공부를 바탕으로, 여기에서 매일 다른 와인들을 사 오셨는데요. 가족들 반응, 특히 남편의 반응이 좋으면 엄청 기뻐하세요. 그런 아빠를 보니 조금 귀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요.

더 다정한 딸이 되고 싶은데 아빠에게는 자꾸 잔소리가 앞서요. 정말 죄송한데, 만나면 잔소리를 멈출 수 없네요. 원래 잔소리 많은 엄마와 점점 잔소리가 많아지는 저. 그리고 왠지 잔소리 싹이 보이는 민이까지. 여자 셋 잔소리에 아빠가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잔소리, 줄여볼게요. 


어른들이 바비큐에 와인을 즐기는 동안, 조용히 민이 정식을 먹는 저의 딸. 된장국과 계란프라이와 조미김, 여기에 하얀 밥과 고기 몇 점으로 마냥 행복하게 배부른 그녀입니다.

아, 그런데 계란 말이에요. 너무 싱싱해서인지, 오늘 계란을 터뜨렸는데 노른자가 안 나오고 병아리 되다 만 아이가 프라이팬에 탁 떨어져서 저 기절할 뻔했잖아요. 여기 정말 유정란 맞나 봐요. 근데 유정란이 싫어졌어요. 앞으로 여행 마칠 때까지 계란 프라이는 제가 안 하고 싶어요. 진심이에요.



식사를 마치고, 집이 좋은 집돌이 셋을 두고 엄마아빠는 풀라까지 산책을 다녀오신다고 했어요. 다른 집은 부모님들께서 자식들 보고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고 걱정하신다는데 말이죠. 저희 집은 젊은이들이 어르신들께 일찍 오시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제발 빨리 오세요. 이제 두 분도 마냥 젊지 않다고요. 내일 해 뜨고 봐도 되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 사이 저희끼리 씻고 놀다 열 시가 됐어요. 마실 나갔다 오신 엄마아빠는 풀라의 콜로세움에서 콘서트가 열렸는데 엄청 멋있었고, 풀라 시내는 어땠는지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어요. 열정이 넘치는 엄마아빠. 내일을 위해 이제 그만 푹 주무세요. 

신나고 고단한 하루가 끝나고 평화로운 밤이 시작되네요. 굿나잇.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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