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Oct 22. 2023

품을 내어주지 않는 곳

오파티야 그리고 리예카


소리에 엄청 예민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초반 이십여 년은 주택에 살기도 했고 평화롭게 잘 살다가, 결혼 전 몇 년을 아파트 중간층에서 살며 지옥을 맛봤지요.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살 집을 고를 때 무조건 탑층을 고집했어요. 탑층에 산다 해서 소음에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고, 이따금 아랫집 말소리며 TV소리와 진동, 담배 냄새가 괴롭힐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중간층에 살 때보다는 훨씬 덜 시끄럽고 마음이 덜 힘들어요.

그렇다 보니 여행 가서 숙소를 구할 때도 위치나 컨디션, 가격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소음입니다. 리뷰를 꼼꼼하게 읽고, 사진과 지도를 통해 주변의 환경을 읽어 가급적이면 조용한 곳으로 구하려 노력해요. 저희 엄마는 항상 제가 깊은 구석에 외따로 자리한 섬 같은 숙소를 구하는 데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하시지요. 그런 엄마도 저만큼 소리에 예민해서, 말씀은 그러셔도 비교적 만족하신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저의 펜트하우스에서 새벽 네시 반부터 쿵쿵 대며 엄청난 소음이 들리는 걸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 새벽에 이사를 하는 건지 수리를 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어요. 외국이라 나가서 뭐라 할 수도 없고, 이 소리에 깬 건 저뿐인데 제가 짜증 난다고 곤히 자는 가족들을 깨울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그저 견디는 수밖에요. 귀마개를 상시 구비하고 있지만, 진동은 귀마개를 뚫습니다. 이건 정말 숙소의 배신이에요.

예전에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스위스 전통가옥인 샬레에 묶은 적이 있어요. 풍경도 아름답고 집도 예쁘고 비싸긴 이를 데가 없는 멋진 곳이었지요. 하지만 그 좋은 곳에서 밤새 스위스산 모기에게 시달리며 자지도 깨지도 못하고, 잡을래도 잡을 수 없던 끔찍한 밤. 와, 거의 그에 비견하는 밤이었습니다. 싸기라도 하면 덜 억울할 텐데요.

그래도 다행히 저를 제외하곤 다들 잘 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냥 제가 액받이를 하는 게 마음은 제일 편하니까요. 모두 굿모닝, 다들 개운하고 행복해 보이네.


시간은 7시 반, 슬프게도 비까지 내리네요. 식사를 하고 비가 그치길 기다려봤지만 흐린 하늘은 갤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펜트하우스에 작별을 고하고 오파티야로 향했어요. 오파티야는 이스트라 반도에 붙어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우아한 고급 리조트단지로 유명해요. 해발 1396미터의 우치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산이 한기를 막아주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온난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의 휴양지로 발전했대요. 덕분에 '크로아티아의 귀부인', '크로아티아의 리비에라’라고도 불린답니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별장이 많다고 하더군요. 

차로 지나면서 보니 건물들도 고풍스럽고 살짝 열린 가게들도 너무 예뻤는데요. 글쎄, 거대한 빗물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거예요. 미친 듯 퍼부어대는 비와 돌풍, 작은 인간이 아니더라도 도저히 걸을 용기가 나지 않는 날씨였지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 카페에 들어갔어요. 모닝커피를 마시며 내리는 비 사이로 드러나는 오파티야를 눈에 담아봅니다. 아쉽고 또 아쉽네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리예카로 향했어요. 리예카는 오파티야처럼 아름답지는 않아도, 오밀조밀 아담한 곳이 많은 크로아티아에서 큼직하고 웅장한 기운을 내뿜는 도시예요.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도무지 품을 내어주지 않는 곳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에게는 리예카가 그래요. 십 년 전에도 날이 흐리고 일요일이라 가게들이 문을 닫아 잘 보지 못했거든요.

이번에는 숙소 체크인 전에 리예카를 미리 한 번 둘러보려 했더니, 비도 내리는 데다 모든 주차장이 다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차를 댈 수가 없었어요. 대학교가 있는지 학생들이며 사람들도 많은데 교통체증도 심하더라고요. 차를 계속 운전한 남편도 지친 기색이고, 뒤에 탄 멀미 듀오 민이와 저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지요. 결국 리예카 시내에서 일단 후퇴해 숙소로 이동했어요.



남편과 결혼하고 엄마아빠와 함께 벌써 7년째 여행을 하는데요. 남편을 위해 숙소를 고를 때는 항상 화장실이 두 개인 곳을 골라요. 다른 건 몰라도 화장실은 편하게 써야 하잖아요. 정 안 되면 볼일 핑계로 도망갈 수도 있게 말이에요. 

그런데 리예카에서는 하루만 머물 예정인 데다 맘에 드는 숙소가 시내에 없길래, 그냥 여행 중 가장 저렴한 숙소에 머물기로 했어요. 그래서 리예카 숙소만 화장실이 하나였어요. 전날 펜트하우스에서 실망이 크기도 했고, 여기는 가뜩이나 저렴하기까지 하니 걱정이 앞섰어요. 아무리 하룻밤이라도 좀 더 돈을 쓸 걸 그랬나 후회를 했지요.

숙소 위치는 리예카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주택가였는데, 내비를 따라가니 정말 하염없이 위로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하늘에 닿겠다 싶을 만큼 높은 곳에 있었어요. 아, 역시 전 정말 이런 숙소를 고르는 데 탁월합니다. 연락해서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는 데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오라고 해주셔서 조금 일찍 체크인할 수 있었어요.


참, 신기해요. 최고가의 숙소에서 불행한 밤을 보냈는데, 이번엔 최저가의 숙소에서 너무 행복했거든요. 발코니로 고즈넉한 동네의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꼭 엽서의 한 장면 같았어요. 정말 평화와 안녕이 가득한 동네였습니다. 엄마는 다음 일정이 없다면 이곳에서 한 달도 살겠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근데 사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일 년도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무엇보다 여기에는 민이가 지금까지도 얘기하는 이층 침대가 있었어요. 와, 우리 딸.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위에 누웠다 아래 누웠다 지치질 않더라고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이층 침대라니 말 다 했네요. 뭐가 됐든 기억에 남으면 좋죠, 뭐. 어쨌든 그녀는 그렇게 행복했다고 합니다.


시간은 1시 40분. 리예카 시내에서 식사를 하려던 계획이 틀어져 급히 라면을 끓였어요. 한국에서도 물론 맛있지만, 외국에 나오면 라면은 진짜 눈물 나게 맛있잖아요. 솔직히 라면까지 갈 것도 없어요. 저는 맨 밥에 고추장만 비벼 먹어도, 거기에 김 하나만 올려도 엄지손가락이 번쩍 들리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필살의 라면으로 배도 부르겠다, 짐을 풀고 나니 비도 살짝 그쳤겠다. 해서 리예카를 재도전하기로 했답니다. 사실 민이는 별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놈의 2층 침대,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장딴지에 알이 박히도록 오르내려도 줄지 않는 2층 침대의 매력이란. 저도 어릴 땐 2층 침대 로망이 있었으니까 그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나가야겠죠. 


리예카는 크로아티아 최대 무역항으로 공업과 무역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해요. 아드리아해 항로의 거점이기도 해서 도시에 활기가 넘칩니다. 메인 거리인 코르조 거리에는 카페와 상점이 들어선 건물이 즐비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요. 하얀 석조로 가로폭이 넓어 걷기도 편하고 건물도 형형색색 귀엽습니다. 특히 노란 시계탑과 원형의 성비투스대성당이 볼거리로 유명해요. 성비투스대성당은 기적의 교회라 불리는데, 크로아티아 100쿠나 지폐의 뒷면에도 실려있어요.


 


비만 안 내리면 조금 흐린 날이 더 다니기 좋아요. 햇살이 강하지 않고 사진 찍어도 살짝 운치 있게 나오고요. 비 온 끝이라 오히려 더 좋다 하며 걷는데 바로 젤라토 가게를 발견했어요. 지금까지 중 가장 화려한 젤라토를 사서 먹는데, 오늘도 역시 민이의 젤라토를 뺏어먹어야 하는 저와 그런 저를 흘겨보는 따님. 입에 가득 넣어 젤라토를 베어 물자 아이 눈에 원망이 가득하네요.

딸아, 너도 언젠가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나도 오드리 헵번처럼 귀엽게 먹고 싶지 오랑우탄이 바나나 씹듯 이걸 그렇게 먹고 싶진 않았단다. 찬 거 이렇게 한 번에 많이 먹으면 머리도 아프다고. 고상하고 싶다.



리예카 거리를 걷는데 글쎄, 십 년 전에 가보고 싶었지만 일요일이라 문이 닫혔던 서점이 그대로 있더라고요. 들어가서 읽을 수 없는 책들 구경도 하고, 민이 장난감과 그림이 사랑스럽던 그림책도 샀어요. 아, 그림책은 제 거예요. 

엄마아빠는 제가 뭘 살까 하면 그거 뭘 사냐, 참아라 하시거든요. 근데 평소에 잘 사지 않는 남편이 물건에 관심을 보이면 그건 그렇게 반가우신가 봐요. 남편이 크로아티아 지도가 그려진 컵을 살펴보니까 바로 열린 지갑. 그럼 엄마 나도... 저거... 했다가 맞을 뻔했네요. 억울해요. 



차별당해 서글픈 마음을 피자와 와인으로 달래는 저녁. 그래도 다들 웃으니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오늘도 참 좋았어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이전 08화 바다와 맞닿은 동화 속 마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