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Oct 22. 2023

십 년 만에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30일 오전 10시. 드디어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습니다. 세상에, 여길 다시 오다니요. 십 년 전 "이곳이 아름답긴 하지만, 세상에 볼 곳이 너무 많으니 또 올 일이야 있겠냐"던 엄마도 감회가 새로운 것 같아요. 역시 산다는 건 '절대'와 '결코'를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로 가득한 일인 것 같아요.

공항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택시 기사님이 반겨주셨어요. 택시를 타기 전에 잠시 양해를 구하고 우선 공항 키오스크에 가서 유심칩을 샀지요. 요즘은 로밍도 잘 되어 있고, E심도 있고, 시내에서도 유심을 살 수 있다지만요. 저는 공항에서 사두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당장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급히 연락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택시를 타고 두브로브니크 시내까지 달리는데 약 30분가량 소요돼요. 물론 버스를 탈 수도 있어요. 십 년 전에 왔을 때는 엄마아빠와 셋이서 버스를 탔지요. 그런데 이번엔 인원이 늘어서, 5인분의 버스비나 택시비나 비슷하기도 하고요. 애도 있고 짐도 많아서 택시를 타기로 했지요. 

얼마쯤 달리니 차창 밖으로 시리도록 파란 바다가 보이고, 곧이어 붉은 지붕이 가득 늘어선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보고 있으면 어째서 이곳이 “아드리아해의 진주”인지, 왜 세계유산이 되었는지, 유럽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찾아오는지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숙소에 도착하니 10시 50분. 호스트가 우릴 반겨줬지요.

두브로브니크에서 숙소를 구하는 방법은 호텔, 민박, 호스텔 등 다양하지요. 그리고 저희처럼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찾을 때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어요. 우선 구시가지 중심에 숙소를 구하는 건데요. 나가면 바로 번화가 한가운데서 볼거리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어 최고지요. 하지만 당연히 숙박비가 높고, 컨디션을 잘 살피지 않으면 낡거나 혹은 시끄럽거나, 가격 대비 퀄리티가 낮은 숙소를 구할 수 있어요.

다른 선택지는 조금 떨어진 신시가지 쪽에 숙소를 구하는 겁니다. 여긴 새로 생긴 건물들이 많아서 시설도 좋고 깨끗해요. 다만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이동하는데 많이 걷거나, 우버나 버스를 이용해야 해요. 숙소로 아낀 돈을 교통비로 쓰게 되죠. 본인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어디를 선택하든 장단점이 있어요.

참고로 가끔 에어비앤비 리뷰를 읽다 보면, 구시가지 쪽에 숙소를 구하면 계단이 많다는 글을 읽는데요. 구시가지는 그냥 돌아보는 데도 계단이 엄청 많아요. 계단은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랄까요.


평소에 저희는 현지 분위기가 나는 곳에서 머무는 걸 좋아해요. 이번에도 두브로브니크에 왔으니 이왕이면 숙소에서도 붉은 지붕과 아드리아해가 보였으면 했지요. 너무 번화해서 시끄럽지 않으면서 두브로브니크를 조망할 수 있고, 구시가지로의 이동에 용이한 곳으로 플로체(Ploce) 거리에서 숙소를 구했어요.

이 플로체 거리에 있는 숙소들은 위치나 뷰 등 많은 이유로 인기가 좋은데요. 다만 같은 플로체 지역이라도 단차가 있어서, 높은 곳은 정말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잘 살피셔야 해요. 대신 힘들게 올라가면 끝내주는 뷰를 얻으실 수 있다고 해요.

저희는 적당한 계단과 적당한 컨디션, 적당한 가격에 화장실은 두 개고 발코니에서 두브로브니크가 보이는, 리뷰에 칭찬일색인 에어비앤비를 선택했어요. 솔직히 사진에서는 좀 낡아 보여서 반신반의 했, 막상 갔더니 식구들이 정말 좋아한 곳이기도 했지요. 발코니에서 바다를 보며 맥주 한 잔 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이 진짜 행복했거든요.


숙소에 도착하자 긴 시간 비행기에 기차에 택시에 지친 어른들은 다들 침대에 뻗어버렸어요. 하지만 작은 인간 민이는 이 방 저 방 탐색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신나게 뛰어다니느라 난리였어요. 이 아이의 에너지를 당할 자가 저희 집에는 일단 없네요.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일단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는 실감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다 같이 집 밖으로 나갔어요. 우선 뜨거운 태양이 우릴 반깁니다. 파스텔로 그린 듯한 하늘과 바다와 몇 번을 말해도 질리지 않는 붉은 지붕과 들뜬 얼굴의 사람들. 만질 만질 대리석 돌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걷고 또 걸었어요. 모두 신이 났지요



조금 걷다 보니 허기가 느껴졌어요. 뭘 먹을까 얘기하던 중에 눈에 들어온 피자집이 있었는데 보자마자 놀라고 말았어요. '올리바 피자'.

십 년 전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먹은 게 바로 이 올리바 피자였어요. 그때는 지금만큼 크로아티아 여행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는데, 블로그에 올리바 피자는 저렴하고 맛이 좋으니 먹어보라는 추천이 꽤 됐어요. 그래서 물어물어 찾아와 먹었던 기억이 생생한대요. 그곳이 여전히 있다니 놀랍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올리바 피자에 가서 자리를 잡았지요. 피자도 시키고 샐러드도 시키고 파스타도 시켜서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첫 끼를 맛있게 배불리 먹었어요. 나가는 길에 주인아저씨께 "십 년 전에 여기 왔었다”라고 이야길 했는데 정말 반겨주시더라고요. 아마 예전의 저였다면 그냥 마음으로만 생각했을 텐데, 아줌마가 되고 나니 말이 많아지네요. 그래도 이런 말이 느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해요. 남 흉보고 욕하는 말은 줄여야겠지만요. 


 

올리바 피자에서 맛있게 먹고 나와 잠시 바닷가를 걷는데 입구에 젤라토 가게가 눈에 띄었어요. 일단 민이가 달려갔고 저희도 뒤를 따랐습니다. 맞아요, 여기 왔으면 젤라토를 먹어야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예전에 저는 취향에 맞는 젤라토를 제 몫으로 온전하게 하나 다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저는, 민이가 하나를 다 먹으면 너무 많아서, 그녀가 고른 취향의 젤라토를 반씩 뺏어먹는 악역 겸 잔반처리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물론 남편이 할 수도 있지만, 남편은 상큼한 요구르트나 과일맛을 좋아하는 데다 덩치도 커서 하나도 모자라거든요. 슬프게도 민이와 저는 입맛 동일체라 좋아하는 음식이 완벽 일치하는 덕에 젤라토 절반 먹기는 제가 당첨이에요. 여하튼 덕분에 여행 끝나고 민이가 “엄마는 좋은데, 젤라토 뺏어먹어서 나빠”라는 평가를 얻었답니다. 엄마도 고상하게 먹고 싶지 너 먹는 거 뺏어먹는 추잡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단다, 딸아.


젤라토도 먹고, 걷다가 바다 구경하고, 바다 수영하는 사람들도 구경했어요. 민이는 당장 바다로 들어가자 재촉했는데, 그런 주제에 또 남편이 안아서 발을 담그게 해 주면 무섭다 난리네요. 남편과 민이가 바닷물에 발 담그고 꽁냥 대며 노는 사이 저는 혼자 온 여자처럼 고독하게 서 있었어요. 기분이 좋네요. 계속 고독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곧 민이 발 닦는 수건이나 대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지요.

엄마아빠는 그런 저희를 뒤로 하고, 두 분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따로 산책을 하셨지요. 진짜 신기한 게, 평소에는 차마 글로 쓸 수 없는 파국의 사이인데요. 여행만 오면 그렇게 사이가 좋으세요. 한국에서도 이만큼 지내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봐 돌아오는 데, 눈앞에 딱 봐도 되게 맛있어 보이는 젤라토 가게가 다시 보였어요. 한국이었다면 아까 먹었으니까, 하며 참았겠지만 여기 와서 무슨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바라며 젤라토를 참겠어요. 다시 먹었지요. 근데 여기가 진짜 맛있는 거예요. 젤라토 이름도 멋있고 젤라토 맛도 맛있고. 진짜 반해버렸답니다.

물론 이 멋있고 맛있고 다 하는 젤라토도 반만 먹어야 하는 게 짜증 났지만, 저보다 더 짜증 난 얼굴을 한 민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쑥 들어가네요. 부모가 돼 보니 자식이 제일 무서워요. 괜히 상전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뒤돌아서 엄마에게 업어달라고 투정 한 번 부려봤어요. 그러다 나이 마흔 넘어 타지에서 엄마한테 등짝 맞을 뻔했지요. 이래저래 치이는 삶이군요.



집에 가서 짐을 정리하고 남편이랑 오붓하게 둘이 부족한 물건을 사러 다시 마트에 갔어요. 사실 남편은 크로아티아를 반쯤 등 떠밀려 온 거라 좋을지 걱정했는데요. 다정한 이 사람은, '바다도 풍경도 예쁘고 왜 당신이 그렇게 계속 얘기했는지 알겠다'며 자기도 좋다고 얘기해 줬어요. 참 고맙네요.


저희 숙소의 최고 장점은 발코니예요. 바다도 보이고, 넓고, 다른 집에서도 잘 안 보여서 다들 편한 차림으로 나와 앉아 식사를 했어요. 두브로브니크의 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와인 한 잔과 수다와 식사를 즐겼지요. 오기 전까지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았지만, 막상 이렇게 모여 앉아있으니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모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제 삶은 참 축복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이런 마음이면 좋을 텐데요.

다들 씻고 난 후 혼자서 천천히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며 긴 비행의 피로를 녹였어요. 그리고 나왔는데 7시 반에 이미 남편과 수민이는 침대에서 곯아떨어져 있더라고요. 두 부녀가 사이좋게 코를 골며 대자로 누워있는데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요.


근데 더 대단한 건 엄마아빠였어요. 게으르고 잠 많고 체력 안 좋은 자식새끼들이 침대에 뻗어버린 걸 보고 화를 낼 수도 없고 속이 터지던 엄마아빠는, 저녁에 두 분만 나가서 해피 타임을 즐기기로 하셨어요. 여러모로 대단하죠, 정말.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10년 전에 지금보다 더 팔팔할 때 두 분이 어땠겠는지를. 한 달 반 여행을 마치고 오면 건초염에 족저근막염에 제 몸이 성한 데가 없게 끌려다녔다고요. 오죽하면 서른두 살이었을 때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 앞에서 “나 이제 이거 안 보고 숙소 갈래”하며 애처럼 울었겠어요. 하, 정말 기운이 충천하신 엄마아빠랍니다.

엄마아빠가 저도 잘 거면 열쇠 가지고 나간다고 하셨는데 저는 당연히 안 자죠. 두 분 나가시고 남편과 아이가 숙소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걸요. 음악을 들으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혼자 감성적인 두브로브니크 나잇을 즐길 생각입니다. 그리고...

책 세 줄 읽고 고개가 무거워진 게 기억의 끝이었어요.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엄마아빠가 밖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요요. 책 자국, 침자국이 범벅된 얼굴로 문을 열어드렸더니 네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으시네요. 그런데 진짜요, 저도 예전엔 막 새벽까지 음악 듣고 감상에 젖어서 밤새워 글 쓰고 그랬거든요. 신기하게 아이 낳고 나니 불면이라는 단어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잠, 그것은 보약이요 천국이니. 그걸 제가 아이 낳고 알았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첫 밤이 무사히 막을 내렸네요. 아름다운 밤입니다.

우리 계속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