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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Oct 22. 2023

밤하늘을 날아서

공항에서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맞이하니, 호랑이 새끼 아니, 남편이 냉장고에 남은 계란과 빵 등으로 잡탕 브런치를 해주었어요. 하루가 길 예정인지라 아침을 든든하게 먹습니다. 그리고 짐을 마저 싸고, 정리하고, 청소도 하고, 세탁기도 한 번 돌렸지요. 집 안의 전기 코드를 다 뽑고, 창도 닫고, 문단속도 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집을 날아다니다시피 했더니 어느덧 시간은 세 시가 되었어요.


마지막으로 문을 잘 확인하고 집을 나섭니다. 저희는 차를 가져가지 않고 인천공항으로 갈 예정이라, 마음이 바쁘네요. 우선 집 앞에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출발, 오후 네 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미리 예약해 둔 공항 직통 열차로 갈아탔지요.

사실 처음에는 광명역으로 가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갈까도 고민했어요. 그게 시간이 더 빠르거든요. 하지만 아직 여섯 살인 민이가 괜찮을지 걱정이었어요. 물론 민이는 지금껏 배변 문제로 속을 썩인 적 없는 훌륭한 어린이이긴 하지만, 불시에 급습하는 아이의 배뇨와 배변 신호에 신속히 대응하려면 기차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더구나 비행기를 타면 긴 시간 계속 앉아있어야 하는데, 그전에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편한 기차를 타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의 이런 철저하고 완벽한 대비에도 아이는 화장실에 가지 않았어요. 간 건 저뿐이었지요. 결국 저를 위한 선택이었던 걸까요?

어쨌든 무사히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장 쪽으로 걸으려는 데 느닷없이 카트 한 대가 저희 앞에 다가왔습니다. “타시겠어요?” 구세주 같은 한 마디. 물론입니다. 짐이 큰 트렁크와 작은 트렁크에 매는 가방, 거기다 가장 무거운 민이라는 짐까지 있으니 걷는 것과 카트를 타는 것은 하늘과 땅에 비견해도 되겠지요. 물론 카트를 권하신 건 민이 때문인 것 같았어요. 작은 인간도 쓸모가 있네요.

마치 놀이공원에서 퍼레이드 하는 공주라도 된 양 사람들에게 손 흔드는 민이와, 그녀가 부끄러운 저와, 편한 게 마냥 좋은 남편을 싣고 카트는 신나게 달려갔어요. 걸었다면 십몇 분은 낑낑거렸을 거리를 순식간에 도착했지요. 내리고 나서 셋이 함께 배꼽 인사를 드렸어요. 감사합니다. 여행의 시작이 좋아요.


항공사 카운터에서 엄마아빠를 만났어요. 모두 들떠 있었지요. 어제까지 일하고 온 남편에게는 약간의 피로가 남아 있었고, 아직 여행이 뭔지 잘 모르는 민이는 조금 멍해 보였지만, 원래 여행 다니길 좋아했던 엄마아빠와 저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어요. 심지어 이번 여행은 십 년 만에 크로아티아 아닙니까. 우리 가족 여행 역사의 시작점이자 제가 맛본 최고의 파라다이스! 그런 크로아티아를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심지어 어미가 되어서 애를 데리고 가다니요.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면서 행복한 기분이 저를 감쌌어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딱히 면세점 구경은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카페에 갔어요. 진한 커피 한 잔에 달달한 도넛으로 허기를 달랜 후에, 시간 맞춰 출국 게이트로 향했어요.


드디어 탑승 시간! 비행기에 타서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날아오르기만 기다리는데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어요. 시간이 되어도 비행기는 움직일 생각이 없고, 파일럿들이 밖으로 다 나와 있었거든요. 뭐지? 이런 일은 또 처음인데? 다들 웅성거리는 사이 결국 방송이 나왔습니다. 조명 문제로 잠시 하차해 달라는 말이었어요.

그때 시간이 10시 반… 저희는 인천에서 헬싱키로 날아가 다시 두브로브니크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는데, 환승 시간이 짧은 편이었거든요. 여기서 어긋나면 여행 스케줄도 엉망이 될 터입니다. 걱정이 너무 컸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초능력으로 조명을 다 킬 수도 없고. 마음으로 기도나 하는 거죠.

기도가 통했는지, 다행히 1시간 뒤에 탑승을 할 수 있었어요. 저희는 환승할 비행기도 같은 항공사였는데요. 얘기를 들으니, 보통 이렇게 딜레이가 될 때는 항공 스케줄이 너무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기다려주기도 한다더군요. 승무원 분께서 말씀하시길, 저처럼 두브로브니크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되기 때문에 헬싱키에서 출발하는 비향기가 기다려준다고 했으니 내리면 최선을 다해서 뛰어가라고 하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비행기 내린다, 뛴다, 또 뛴다, 무조건 탄다. 기억하겠어요.


새벽 1시. 이제 진짜 떠납니다. 민아! 보아라, 너의 첫 비행! 이제 밤하늘을 날아 두브로브니크까지 가는 거야. 얼마나 멋지니. 저는 딸과 이 순간을 함께 기념하려 했지만, 사랑하는 저의 작은 인간은 비행기가 뜨기도 전에 코를 골며 잠들었어요. 네, 그녀는 비행기가 뜨는 순간을 보지 못한 채 꿈나라를 향해 훨훨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게도 비행 내내 푹 자고 일어나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버텨주었어요.

그래서 큰 인간들도 비행기에서 잘 있다가, 헬싱키에서 내리자마자 두브로브니크행 비행기를 향해 진짜 최선을 다해서 뛰어갔어요. 제 마음에는 오직 한 문장! 타야 한다, 타야 한다! 네, 그래서 탔습니다!! 해냈습니다!! 와, 진짜 어제부터 심장이 조였다 풀어지는 게, 여행 마치기 전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어요. 

곧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조용히 만화를 보는 민이와, 쿨쿨 잠든 남편. 그리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아빠까지.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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