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나쁜 상사보다 더 무서운 건 애매한 상사다

직장인의 얼굴들 : 판단을 유보하는 리더십의 위험

by 딥핑소스

애매함의 리더십

B본부장은 표면적으로는 본부 인원들을 아끼고 세심히 챙기는 리더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결정 앞에서는 팀장이나 본부 인원들에게 떠넘기듯 빠르게 털어내고 싶어했다.


회의가 길어지는 걸 싫어했고, 결정의 여파를 오래 끌고 가는 걸 피했다. 그래서 회의 말미엔 늘 같은 말이 나왔다.


“일단 이 방향으로 가자. 세부는 알아서 정리해줘.”


그 말은 결단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판단의 무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기보다, 책임이 자신에게 오래 머무르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결정이 언제나 빠르지는 않았다. 늘 “일단 이렇게 하자”라는 잠정적 결론으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 잠정적 결론은 곧 경영진에게 보고되었고, 만약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결정은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위의 평가에 따라 수정되는 결론이었다.


결국 그는 책임을 나누지 않고, 판단을 순환시켰다. 그는 방향을 제시했지만, 그 방향의 책임은 끝내 지지 않았다.


책임의 부재와 냉정한 성과지표

그는 늘 위의 의중을 강조한다.

“대표님과 경영진이 원하시는 방향은 이거니까...”


그 말은 마치 객관적 판단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결정을 위임하는 방식이다.


조직은 점점 두 개의 리더십으로 나뉜다.


하나는 결정하지 않는 리더, 다른 하나는 대신 책임지는 팀장.


판단의 주체가 사라진 조직에서는 충성과 피로만 남는다.


B본부장은 스스로를 인자한 리더라고 생각한다. 그는 구성원의 말을 잘 들어주고, 의견을 존중하며, 가능한 한 모두의 생각을 반영하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의 순간이 오면, 그의 판단 기준은 놀라울 만큼 냉정하다. 그때가 되면 그는 감정이나 관계보다 성과와 효율을 먼저 본다.


결정 과정에서의 공감은 빠르게 사라지고, 남는 건 결과만이다. 그의 리더십은 온화함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성과지표로 끝났다.



조직의 피로를 키우는 리더의 판단 유보

그는 다른 본부장들과의 조율에도 약했다.


회의에서는 “서로 잘 맞춰보자”고 말하지만, 정작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결정을 미룬다.


매번 인원 지원이 필요할 때면 자기 본부에는 단 한 번도 인력을 제대로 받아오지 못하면서, 다른 본부나 팀에서 요청이 오면 그들의 프로젝트에 자기 본부 인원을 지원 보내는 일만 반복됐다.


경영진이 “그건 이번에 B본부가 맡아라”라고 하면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했다. 다른 본부에서 성과가 나지 않을 것 같은 프로젝트를 넘겨도, “내부 일정상 어렵다”는 말 한마디를 방어하지 못했다.


그 사이 B본부의 리소스는 점점 줄었고, 업무의 불균형은 누적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쩔 수 없이 우리 B본부에서 해야 할 것 같아. 어짜피 해야하는 일이니 서로 힘들어도 조금씩 양보하자.”


그 말은 배려처럼 들리지만,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말이었다. 조율하지 못하는 리더십은 결국 내부의 피로로 돌아온다.


그의 애매함은 외부에선 무력함으로, 내부에선 체념으로 작동했다.


생각, 실행, 판단의 외주화

조직 내 관리나 성과 개선이 필요할 때면 그는 늘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회의 자리에서는 “좋은 의견들 좀 정리해보자”고 말하고, 막상 구체적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면 팀장들을 불러 “각자 생각 좀 해보라”고 한다.


그 결과, 아이디어는 아래에서 올라오고 해결을 위한 보고서는 특정 리더의 손에서 완성된다.


인력 운영 방안도, 교육 계획도, 심지어 본부장 본인이 해야 할 관리 대책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짜준걸 보고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는 그 보고서를 받으며 말한다.
“좋아, 이 정도 방향이면 보고해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결정해도 될 것 같아.”


하지만 그 ‘좋다’는 말 뒤에는 어떤 실행의 주체도, 책임의 의지도 없다.


이 본부의 구조는 단순하다.


생각은 아래에서 나오고, 결정은 위에서 묶이고, 성과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판단을 유보하는 리더 밑에서는 노력조차 방향을 잃는다.



리더십의 대체자

리더십의 공백은 결국 누군가의 손으로 메워졌다. 본부 내 리더십이 흔들리던 시기, 경영진은 각 본부의 분위기 쇄신과 기획력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자 일부 리더들은 내부 진단과 교육을 통해 조직의 사고 구조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형식적인 워크숍이 아니라, 각자의 사고 체계와 실행력을 객관적으로 점검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누가 주도했는가가 아니라 기준이 복원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시도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본부가 스스로의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는 첫 번째 자가진단에 가까웠다.


리더십이 부재한 자리를 대신 메운 건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 내부 일부 실무진들의 자생적 의지였다.

그것이 B본부의 가장 냉정한 현실이었다.



리더십의 마지막 온도, 무기력

애매한 리더의 위험은 악의가 아니라 판단의 결핍에 있다. 그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기 위해 결국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그의 무난함은 책임을 대신 지는 사람들의 피로 위에서 유지된다. 리더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 순간, 결정은 아래로 낙하한다.


그 무게를 버티는 사람들만이 조직을 겨우 굴려서 유지해간다.


결국 애매한 리더는 조직을 조용히 붕괴시킨다. 갈등은 사라지지만, 성장도 멈춘다.


그의 리더십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다. 단지 아무런 온도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리더가 더 위험하다.


그는 폭군보다 조용하고, 무능한 상사보다 유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남기는 건,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조직이다.


악한 리더는 적어도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애매한 리더는 누구도 맞서지 못하게 만든다.


조직의 온도를 빼앗는 건 분노가 아니라, 무기력이다.


판단을 미루는 리더십은 감정보다 더 냉정하게 조직을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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