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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Nov 01. 2020

청聽으로 음音을 완성하다

음악을 재구성하는 나의 청음 시간, 산책


오늘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위한 몸 쓰기인 아침산책을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어폰을 꽂았다. 지난 2월에 한 퀸텟의 공연 실황 녹음본을 믹싱 엔지니어로부터 전달받아 모니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 안에 앉아 차분히 들어보는 것도 좋지만, 나의 몸의 리듬과 나의 걷는 속도로 변화하는 풍경, 나의 호흡과 함께하면 새롭고 다양한 것이 들린다.


나의 음악은 순간에 현재라는 시공과 마찰을 하면서 터뜨리듯 내어놓은 그런 음악이다. 삶이란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후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 투성이다. 때가 되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와 접점을 이루는 다른 요소들이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는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일을 당장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순간에 집중하여 무아지경으로 과감하게 행할 때는 또 그리하지만, 우리는 반추하고 앞으로의 일을 그려나가며,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품에 안고 사는 '나'라는 존재를 매일 점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나의 음악을 듣고 또 듣는다. 연주를 했던 그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음악의 음을 넘어서 듣는다. 또한 이 녹음본을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음악에서 믹싱은 사진을 보정하는 작업과 비슷하다. 덜어낼 것을 덜어낼 수도 있고, 어떤 악기는 강조하기도 하며, 일정 음역대의 주파수를 높이거나 낮추면서 악기 소리의 질감도 변화시킨다. 종이에 구체적으로 기보를 할 때에 셈여림이나 아티큘레이션 등을 하나하나 짚어내어 적어내듯이, 믹싱 할 때 각 악기의 셈여림을 조절하고, 한 음 단위로 질감을 바꾸는 일은 조금 지나치지만 구간에 따라서는 변형을 하기도 한다. 악기의 공간 배치도 한다. 이번의 퀸텟 음원은 공연 때와는 달리 더블베이스를 가운데에 놓고 피아노를 오른쪽에 첼로와 알토 색소폰을 왼편에 두었다. 어지럽게 뭉쳐 들리던 음악이 자기 자리를 잘 찾아 조금 더 균형을 이루었다. 물론 아직은 마음에 드는 믹싱이 나오지 않았다. 공연 실황 음원인데, 작은 무대의 특성상 녹음실에서처럼 악기 간 아이솔레이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도 엔지니어에게 더욱 까다로운 작업일 것이다.


팬데믹이 이어지며, 녹음실 한 공간에 앉아 엔지니어와 함께 믹싱을 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상세히 메모를 이메일로 주고받으면서 하고 있다. 일의 진행은 느리고 답답하지만, 산책을 하는 한 시간 내내 음악을 꼼꼼하게 듣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 오히려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두 발과 두 팔을 휘저으며 만들어내는 리듬과 함께하는 치열한 듣기가 오히려 나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음악을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하도록 돕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조차 카오스적이던 음악이 신기하게도 재구성되며 다듬어지고 있었다. 이는 음악 자체의 외면적 변화와는 관계없이, 나의 "듣는 귀"가 재구성된 것이고 나의 이해력이 깊고 넓어진 것이다.


듣는 귀

고서인 악기(樂記)에 의하면 음音은 소리聲가 의미를 갖춘 것이라고 한다. 음악音樂은 음의 배열이 악기로 연주될 때 춤과 노래로 이어져 하나의 무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지금 작업 중인 음원은 분명 소리를 넘어선 음의 경지에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녹음본을 듣기 시작한 초기단계에서는 때로 너무 많은 내용이 복잡하게 뭉쳐져 연주된 부분은 그저 불만족스러운 소음 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앨범 전체의 구성을 고려하면서 대부분이 15분에서 20분 남짓한 트랙의 일부를 통째로 잘라내려고도 했다. 공연 당시 나의 주관적인 경험 중 부정적인 판단을 했던 면이 걸러지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처음에는 그저 나에게 소리聲였던 음악이 내 안에서 점차 의미를 온전히 갖춘 음音으로 변모하고 있던 것이다.


한번, 그리고 여러 번 가본 길은 쉽게 간다. 굳이 집중하여 보지 않아도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여 안다. 거의 무의식적 앎으로 치환된다. 초행길 운전을 할 때 같은 20마일도 더 길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매일 다니던 출퇴근길에는 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충분히 오디오북 듣기나 음악을 듣는 등의 다양한 정신활동을 할 수가 있다. 이번 공연 실황 음악은 나에게 초행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각 트랙의 시작과 끝을 알고, 그 흐름을 직관적으로 알면서 듣기 때문에 이제는 공연 당시 결정된 음악 구성의 이유와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걱정도 된다. 연주를 하고 음악을 만든 장본인도 이 음악을 온전히 듣기까지 최소 2개월 넘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그 누가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음악이 충분히 그의 인지의 경계에 무르익어 다가갈 때까지 들을 것인가? 사실 내가 아는 단 한 사람도 꼽을 수가 없다. 다들 바쁘다. 나 조차도 온 힘을 써서 듣기의 공력을 쌓으며 청하는 음반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음악에서 무엇을 듣는가? 자크 아탈리처럼 예언적인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듣는다는 것은 듣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 이상의 행위이다. 소리 에너지로 이루어진 의미 있는 소리 구조인 음악에 알뜰하게 담긴 천지만물과 인간사의 그 모든 것을 듣고 읽어내는 일이다. 확장하면 의식 에너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듣는 행위로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귀명창"과 "지음"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 지음을 많이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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