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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Nov 01. 2020

새 언어로 새 음악을

상상과 악상樂想


상상이란 말은 생각 상과 코끼리 상자의 조합으로 실제로 보지 못한 코끼리를 전해온 물리적 단서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다는 말이다. 실제로 겪지 못한 일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 상상이지만 인간이 이미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정보를 재료 삼지 않고서는 상상은 불가능하다. 코끼리를 직접 보고 만지지 않은 사람들도 풍문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나 코끼리 뿔을 실마리 삼아서 코끼리의 존재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상상이란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공룡뼈를 조합하여 그의 모습을 적절한 근거로 재현해내는 과학적인 일도, 나의 경험과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타인과 세상을 이해한다는 심리학적 개념인 '투시'도 바로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으로 이뤄진다.


작곡가는 악상을 떠올린다. 대학시절과 그 이후로도 몇 년간은, 작곡이든 연주든 음악을 만들어내는 학교에서 접한 다양한 방법 그 기술적 내용을 적용해 듣기 좋은 소리를 찾아, 그것을 모티브로 삼아 악곡을 발전시켰다. 음악적 기술과 음형 자체가 영감이 되어준 셈이다. 물론 나 개인의 감성적 내용이 반영은 되었으나 이는 애초에 내가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했던 그 마음과 궁극적인 정신과는 괴리가 있었다. 기존에 배워 익힌 음악적 언어가 나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악상은 우주적 자아의 탐구와 맞닿아 있으며, 이는 변화무쌍한 우주적 현실과 숭고함 뿐만 아니라 지극히 야만적이기까지 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적극적으로 포용해야만 했다. 또한 나의 악상은 3차원의 물리적인 역학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의 운동은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이 주어졌을 때 그 운동 형태가 드러나기 때문에, 현현한 형태를 낱낱이 기보 하는 것보다는, 에너지와 움직이는 방향을 일러두어 연주자가 운동하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러한 나의 악상과 최대한 가까운 음악을 구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 텐데, 기존의 기보 시스템과 음악 행위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이후에 찾은 방법은 자유 즉흥 연주였고 지난 4년여간은 나름대로 왕성한 활동을 했고 결실들도 이어졌다. 나의 멘토이신 배일동 명창님을 말을 빌리면, "즉흥음악이란 연주자들 간에 연주곡목의 정확한 틀을 약속하고 연주에 임하는 것이 아닌, 음악가 자신이 지금까지 익히며 숙련되어온 잠재된 음악적 기교미와 형식들이 순식간에 즉흥적으로 발현되어 율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즉흥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자의 깊은 내공과 철학이 충만되여만이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경계가 무등(無等)하여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말한 반야심경의 부증 불감(不增不減) 이치처럼 형식에 속박되지 않고 즉석에서 자유롭게 율동하는 것이다."


자유 즉흥 연주는 각 연주자의 내공이 깊지 않으면 주어진 자유가 힘찬 자율적 창조로 이어지기보다는 어설프고 공공의 삶에 의미가 없는,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 음악이 되기 쉽기 때문에 어려운 면이 있다. 특히나 '악상', 즉 내가 창조해내고자 하는 음악의 메시지가 뚜렷할 때에 이를 자유 즉흥이라는 공동의 창작에 맡기는 것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새로운 작곡 어법이 필요했다.



악보樂譜와 악상樂象


나는 임시로 붙인 이름, '그림 악보'라고 부르며, 나의 음악적 영감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혹자는 그래픽 스코어의 카테고리 안에 포함시키고 싶어 할는지 모르겠다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 악보를 읽어내는 데에는 위에 말한 '상상력', 즉 주어진 실마리를 바탕으로 추론과 자신들의 음악적 감성과 지성 영역으로 해석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연주자 자신의 영감과 악보 내용과 관련한 음악 외적인 정보를 사전에 공부하여 곡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그래픽 스코어는 더욱더 직접적으로 악보에 적힌 정보를 소리로 치환하는 방식이 많다. 문자로 따지면 알파벳처럼 소리를 기호화한 것이 그래픽 스코어라면, 한자와 같이 글자가 형상 즉, 이미지로 또 상징으로 의미를 담아내어 인간 소통에 작용하는 것이 이 '그림 악보'이다. 이는 조금 더 풍성한 연주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있고, 나는 이것이 애초의 이 악곡을 작곡하는 데의 영감, 즉 악상이 잘 표현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기보 방식은 와다다 레오 스미스의 Ankrasmation에 영향을 받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구축된 그의 작곡 언어를 완벽히 마스터하지는 않았으나, 기반이 되는 '리듬 유닛'이라든지 색의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방법, 다른 유용한 기호들을 차용하고 있다. 또한 오선 악보를 쓰지만 박자표에 의해 정해져서 반복되는 마디 구분으로 인한 짜인 펄스가 리듬에 기준이 되지 않고 음의 길이와 그만큼의 침묵이 조화를 이루어 자연스러운 호흡에 의해 리듬이 만들어지면서도 작곡가가 의도한 음의 구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 방식을 배웠다.


나는 이러한 작곡 방식과 어법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사회의 구조를 제시한다고 여기고 있다. 아니 이러한 음악 행위가 지속되면서 새로운 삶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The Sacrifice> 2019

세월호로 잃은 소중한 목숨들이 기억의 지층 위 현재의 우리의 의식에 불을 밝혀 남은 자들이 나은 역사를 만들어가도록 하려는 의지적 과정을 그린 악보이다. 2019년 보스턴과 서울에서 각각 실연되었고, 서울 실황은 <존재들의 부딪힘, 치다> 앨범에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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