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로봇인줄 알았어요
2025년 4월 어느 날, 나는 이스트우드 한인 거리에 있는 GP(General Practitioner, 일반의)를 찾아갔다. 3월부터 계속된 오른쪽 팔꿈치 통증도 심해졌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까지 몹시 저려왔기 때문이다. GP는 처음엔 팔목터널 증후군을 의심했다. 그의 권유대로 병가를 내고 오른손 팔목 초음파 검사를 받았으나 사진 판독결과 별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의사와 다시 상의해 팔꿈치 주변 초음파 검사와 CT 촬영을 했다. GP는 그 결과를 보고 오른쪽 팔의 인대가 파열되고 근육에 염증이 생겨 신경을 누르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오른쪽 팔목이 망가진 이유는 내 예상대로였다. 2025년 초부터 개인적으로 소개받은 일이 연달아 생겨 주중 평일에는 회사일을, 주말에는 개인일을 하며 몸을 쉴 새 없이 혹사 시켰다. 주 7일 일하는 날들이 3개월 이상 계속되니 오른쪽 팔목이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는 주말마다 개인 하우스에 페인트 칠을 했다. 페인트 일은 붓질하는 오른팔을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다. 주중에 하는 일도 대부분 오른손으로 드라이버나 스패너, 망치 등을 쓰는 일이니 내 오른팔은 몇 달 동안 혹사를 당했다. 주말에 일한 대가로 번 돈을 가족들을 위해 쓴 보람은 있었으나 통증으로 고생하니 내 몸도 예전과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심정을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사를 개사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기운 센 로봇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늙는다는 것을
그래도 난 괜찮아, 난 사람이니까
만화에서 보았던 로봇인 줄 알았어요
악당을 무찌르는 마징~가
몰랐어요, 난 내가 약해진다는 것을
그래도 낸 괜찮아, 난 사람이니까
한참 동안 찾았던 내 꿈은
하늘로 올라가 새벽별 돼 버렸지
따라잡을 수도 없게 너무 멀리 갔지
누가 저기 보내놨어
누가 저기 걸어놨어
우주에서 호주로 날아온
만화 속의 로보트가 녹슨 쇠가 돼 버렸지
내가 날 만난 것처럼, 마치 정해진 것처럼
나는 매일 늙어갔지
나는 매일 늙어갔지
나는 2019년 12월 31일, 한국의 직장을 퇴사했다. 며칠 뒤 2020년 1월 초에 가족이 살고 있는 호주로 이주했다. 이후 내 삶은 한국에서의 삶과는 매우 다르게 흘러갔다.
한국에서 나는 주로 정보통신 관련 일을 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이용해 코딩을 하거나 문서를 만들었다.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개발과 유지보수를 주로 했기에 컴퓨터 하드웨어 담장자들이 많이 쓰는 통신 장비용 툴들도 거의 쓰지 않았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나는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였다.
그랬던 내가 호주에선 여러 가지 연장과 도구를 쓰게 되었다. 학교, 사무실, 아파트, 학교 등을 청소하기 위해 마대 걸레와 진공청소기를 사용했다. 벽과 천장, 가구 등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크고 작은 붓들과 롤러를 손에 잡았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가공하는 공장에선 길고 짧은 칼들을 썼다. 아이폰 수리업체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 매우 작은 십자와 일자 드라이버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분해하고 조립했다. 집들을 수선해 주기 위해 망치, 그라인더, 톱, 드릴 등과 같은 다양한 도구와 연장을 사용했다.
처음엔 한두 가지밖에 없던 연장들은 날이 갈수록 하나둘씩 늘어났다. 나는 오늘도 여러 연장통을 자동차 싣고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다.
오른쪽 팔의 부상은 무작정 일만 하던 나에게 멈춰서 생각할 기회를 제공했다. 돌이켜보니 한국에선 인문학과 철학책을 읽으며 몸이 정신보다 하위가 아니며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던 내가 낯선 환경에서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니 몸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구체적 현실과 마주하니 책으로 쌓아온 사변적 사유는 무력했다. 몸의 현장, 구체적 노동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철학적 사유가 요구되었다.
모든 연장은 몸의 확장형 표현이다. 나는 내가 사용한 연장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이야기는 곧 내 몸에 대한 헌사요, 내 몸을 고통스럽게 한 행위에 대한 반성문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그리고 호주에서 나와 함께한 연장들에 대한 사용 보고서요 그 연장들과 연결된 내 삶에 대한 사유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