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 링(Rubber Ring)

이토록 사소한 그토록 중요한

by 이승형

나는 며칠 전 고압 물 분사기로 어느 집 보도에 눌어붙은 이끼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분사기의 호스 연결부위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살펴보니 호스와 분사기를 연결하는 어댑터 중간에 삽입되는 작은 고무 링 마모되어 그 틈으로 물이 새는 거였다. 그럴 때를 대비해 고무 링과 패킹을 보관하는 배관용 공구함을 뒤졌으나 딱 그 사이즈의 고무 링만 없었다. 응급조치로 배관용 실링 테이프(Sealing tape)를 고무링이 들어가는 홈에 감고 어댑터를 끼웠는데 물이 계속 샜다. 결국 나는 작업을 중지하고 그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호주의 대표적인 웨어하우스인 버닝스에 가서 해당 고무 링을 사 와야 했다.

고무 링이나 고무 패킹은 배관 작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싱크대 하부에 연결된 하수관 연결 부위엔 얇은 고무 링이 끼워져 있다. 이것을 잘못 끼우면 하수관 밖으로 물이 줄줄 샌다. 싱크대 위에 설치된 수전과 수도관을 연결하는 관의 끝 부분에도 작은 고무관이 삽입되어 있다. 수전의 수도꼭지를 좌우로 돌리려면 연결부위에 고무링이 들어가야 물이 새지 않는다. 수도꼭지를 빼고 그곳을 봉합하려면 끝을 막는 뚜껑 안에 고무 패킹이 있어야 압착되어 물이 새지 않는다. 수압조절용 각종 밸브들에도 어김없이 고무 패킹이 삽입되어 있다. 이런 고무 링과 고무 패킹은 호주달러로 개당 몇 십 센트에 불과하지만 그 가격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고무 링과 같이 작지만 꼭 필요한 곳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도구들이 있다. 나는 연장통에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나사를 챙겨 다닌다. 이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사들이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 큰 나사를 대신 쓰면 재료가 손상되니 딱 막는 사이즈의 나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 하나가 없다면 웨어하우스에 다녀와야 한다. 어떤 때는 나사 헤드가 마모되어 드라이버로 돌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때 나사 제거용 도구가 없으면 더 이상 일이 진척이 안된다. 어느 날은 싱크대 하부에서 수전을 교체하기 위해 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는데 기다란 막대형 육각 렌치가 없다면 아예 일을 할 수 없다. 육각 홈이 파인 나사로 고정된 제품을 분리하려면 딱 맞는 막대형 육각 렌치가 필요한데 이것은 IKEA 등에서 조립가구를 구입할 때 매번 딸려오는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렌치가 없다면 어려움을 겪는다. WD-40라는 분사형 윤활제가 없어서 곤란한 경우도 있다. 자물쇠나 문의 경첩이 녹이 슬어 움직이지 않으면 WD-40을 살짝 뿌려주면 금방 해결된다. 이 윤활제가 없다면 응급조치로 고객 집에 있는 요리용 콩기름을 칠하기도 하는데 그마저 없다면 차를 운전해 사 와야 한다.


작업 현장에선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연장도 필요할 때 없으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한다. 작은 연장과 도구들도 저마다 역할이 있으니 일하러 갈 때 빼놓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연장통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집을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노동자들은 차량엔 온갖 연장을 싣고 다닌다. 그들의 차고나 창고에도 온갖 연장들이 즐비하다. 일하는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연장들을 살펴보고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해 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패를 하고 여러 고난에 처한다. 그런데 그런 고통이 아주 작은 실수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다.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한국의 서해 섬 오지로 캠핑을 떠났는데 불을 피울 라이터나 성냥이 없다면 꼼짝없이 밤새 추위에 떨어야 한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캠핑의 하이라이트인 불을 피우고 삼겹살을 굽고, 밥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군고구마를 숯불에 구어 야식을 먹는 것도 모두 불이 있어야 가능하다. 값싼 라이터 하나가 캠핑 전반을 좌우한다.

사귀던 연인과 영원한 이별로 입에서 잘못 나온 말 한마디로 시작되기도 한다. 사소한 말다툼이 거대한 오해로 바뀌고 인생의 파도는 연인들을 영원히 갈라놓는다.

그토록 원하는 회사의 최종 면접일에 신분증이나 수험표를 지참하지 않아, 전날 친구들과 미리 한 축하주 때문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면접에 참가할 수 없어 취업에 실패한 경우도 있다.


그토록 사소한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고 깨닫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도 좌절하지 말자. 필요한 것을 구해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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