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Pencil)

연필과 노트가 있는 여행

by 이승형

내 블로그 이름은 ‘연필과 노트가 있는 여행’이다. 요즘 세대뿐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도 이제 연필과 노트는 고색창연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청년을 꿈꾸는 나에게 연필과 노트는 내 꿈을 상징하는 낭만적인 이름들이고 지금도 함께하는 친구들이다.


스마트폰 앱이 있어 더 이상 연필도 노트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지만 아직도 목수, 타일러(타일 기술자), 플러머(배관 기술자) 등 현장 노동자는 연필이 꼭 있어야 한다. 특히 목수들은 지금도 귀에 연필을 꽂고 일한다. 연필은 종이에 치수를 적거나 도면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목공 연필로 목재, 타일, 금속판, 기와, 벽돌등에 절단해야 될 위치를 표시한다. 볼펜이나 매직이 연필보다 더 좋은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목재나 콘크리트 같은 거친 표면엔 볼펜으로는 선이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수성 사인펜으로 타일에 표시를 하면 물이 닿았을 때 번지거나 지워진다. 그렇다고 유성 사인펜으로 표시를 하면 지우기가 어렵다. 목공 연필의 굵은 심은 거친 표면의 홈까지 파고들어 선을 그을 수 있고 연필의 흔적은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진다. 그러니 연필이 없다면 목재를 어느 선까지 잘라야 할지, 타일을 얼마큼 잘라내야 할지, 벽의 어느 위치에 드릴로 구멍을 뚫을지를 표시하겠는가? 일하다 보면 노트가 아니어도 A4용지 딱 한 장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때가 있다. 만들 가구의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고, 다른 부분과 연결하기 위해 잘라낼 모양을 미리 그려보기 위해서다. 연필로 종이에 그림을 그려봐야 가구나 물건의 입체적 모습이 형상화된다. 또 바쁠 땐 스마트폰 앱을 구동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손에 쥐고 다니면서 물건을 구입했는지 바로바로 체크하기 위해서 종이가 필요하다. 이렇게 연필과 노트는 함께 있으면 더 좋은 친구다.


호주 현장 노동자들이 하루에 한 번은 들른다는 웨어하우스인 버닝스에서 목공용 작업용 연필을 묶음으로 판다. 호주의 유명한 슈퍼마켓 체인인 ALDI에서도 가끔 싸고 성능이 좋은 연장을 파는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목공용 연필은 알디에서 구매했다. 목공 연필은 납작하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쓴 연필의 모양은 둥글거나 육각형 모양이다. 손에 쥐고 필기하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목공 연필이 납작한 것은 쓰고 나서 경사면에 두면 쪼르르 굴러가 잃어버리기 쉬우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목공 연필은 나무뿐만 아니라 타일이나 금속에도 재단할 선이나 위치를 표시할 수 있다. 또한 연필심이 두꺼워서 거친 표면에 글씨를 쓰거나 선을 그어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필통과 공책은 학창 시절 필수품이었다. 필통엔 여러 자루의 연필이 들어있어 공책에 선생님이 칠판에 쓴 내용을 공책에 받아 쓰다가 연필심이 부러져도 걱정이 없었다. 연필은 공부할 때 말고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여행을 가서 그때그때의 소감을 기록하기 위해 수첩과 함께 갖고 다녔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던 시기엔 업체나 고객을 방문할 때도 상시 휴대품이 연필과 노트였다. 고객과 미팅 시에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는 의미와 표시로 노트를 펴고 연필이나 다른 필기구로 메모했다.

그러나 연필과 노트를 대신해서 요즘은 나도 클라우드에 저장할 수 있는 노트앱을 자주 쓴다. 따로 연필과 노트를 휴대하지 않아도 기록이 필요한 내용을 적을 수 있어서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기록은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에서도 공유해 볼 수 있어 좋다. 나는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노트북과 스마트폰, 태블릿을 이용했고 현장에서도 스마트 폰에 구매가 필요한 물건의 목록이나 작업할 내용과 치수들을 앱을 이용해 기록한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전영록의 노래가 있다.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깨끗이 지워야 하기에. 그러나 어떤 사랑은 지울 수 없는 거였다. 그 사랑은 영원히 마음에 남아 때로 아픔이 되고 때로 애증이 된다. 하지만 목공 연필의 흔적들은 필요할 때 깨끗이 지워진다. 연필은 이렇게 사랑했던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다. 전영록은 알았던 것일까? 내 가슴엔 남아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새로운 인연과 인생을 위해 그와 사랑했던 흔적을 깨끗이 지워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정보화기기의 등장의 연필의 입지가 좁아지긴 했지만 연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특히 일하는 현장에선 연필이 더 오래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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