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1)
“어서 오세요. 잘 지냈어요?”
난 지그시 남자를 바라보다 그의 가슴에 쓰여 있는 명찰로 시선을 옮겼다.
신경과 강상석 교수
새로 바꾼 병원은 예전보다는 집과 좀 더 가까운 대학 병원이었다.
난 한 발 물러나 옆에서 열일하기 시작하는 ‘가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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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발과 얼굴과 눈동자와 입이, 먹을 흡수한 붓으로 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난 심연 속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시끄러운 소리들, 관찰하는 듯한 수많은 시선들.
이 몸의 주체가 사라져 버린 이후로, 조금이나마 알아듣기라도 했던 것들은 이젠 그냥 소리가 되어버렸다.
“너희들 주디는 강철 주디냐... 쉬지를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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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이현식에게 말했다.
“뇌파 검사와 MRI검사도 한 번 해보면 좋겠네요. 일정 잡고 가세요.”
“네. 교수님.”
“그럼 3개월 뒤에 볼까요?”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야. 그거 물어봐.)
이현식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이현식은 말했다.
“뉴스에서 보니 간질을 뇌전증으로 병명을 바꾼다는 말이 있던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교수가 말했다.
“환자분 편한 대로 하세요. 간질이라고 하셔도 되고, 뇌... 뭐라고 하셨죠? 아, 뇌전증.
뭐,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
(그래. 편한 대로.)
“네. 편한 대로.”
...
‘가면’은 다정한 미소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면담실에서 나왔다.
‘가면’과 강상석 교수의 면담이 끝이 났다.
정신이 몽롱한 것이 졸린 게 아닌가 싶다.
나는 하품을 쩍 하며 말했다.
“가면아, 다음은 뭐냐.”
눈앞에 둥실 떠 있는 가면 하나가 입 주변을 오물거렸다.
“정신과 면담요.”
“아, 스트레이트.”
“아니요. 오늘은 커트인가 봐요. 단발.”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병원 본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정신건강의학과 오영지 교수라는 이름표를 읽고 교수의 머리를 봤다,
단발 커트에 머리끝은 살짝 말아놓은 모습이 나름 예뻐 보였다.
분명 환시에서는 장발이었는데.
(얘도 대충 하면 돼요?)
가면이 내게 물었다.
(어. 대충 해줘. 아, 그거 하나는 물어봐라. 리단 정 먹을 때마다 속 메스껍다고.)
‘가면’과 정신과 오영지 교수의 면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가면’이 물은 리단 정에 대한 질문에는 식 후 바로 먹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별 다른 일 없이 또 하루의 의사들과의 면담이 지나갔다.
수납을 하고, 약국을 들러 약을 샀다.
3개월 치의 약이 들어 있는 봉지를 들고 약국을 나온 나는 중얼거렸다.
“뭐 먹을까?”
“‘그’가 좋아했던 건 돈가스네요.”
“흠. 그럼, 짬뽕.”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을 가방에 넣고 병원으로 돌아가 흡연실을 찾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구석진 곳에 있는 흡연실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같은 흡연실에 있던 한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젊은 놈이 건강도 생각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 되냐고.
나는 그 할아버지에게 답했다.
“니나 잘하세요. x 팔아.”
뒷목을 잡고 숨을 들이켜는 할아버지를 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외쳤다.
“뭐. 할배! 뭐!”
할아버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나를 피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사람 붙잡지 않아도 돼요?”
허공에 둥실 떠오른 가면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잡아서 뭐 하게?”
“알려줘야죠. 위험하다고.”
“개뿔이. 지 성질 못 이겨서 지 마누라 죽인 놈인데 뭘 알려줘.”
“네?”
“뭐?”
“조금 전 한 말이요.”
“내가 뭐라 했는데.”
“저 할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죽였다고요.”
“내가 언제 그랬는데.”
가면은 아무런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가면을 좌우로 흔들었다.
난 더욱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입에 머금은 연기가 제법 떫었다.
퉤 하고 침을 뱉어내고 멘솔 담배를 꺼내 한 개비 물었다.
화악하고 퍼지는 입안의 향기에 만족한 나는 귀걸이 이어폰을 귀에 걸고 mp3를 재생시켰다.
시끄러운 소리가 질색이라 기존에 있던 음악을 전부 지워버렸다.
선곡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잔잔하게 가라앉은 저린 선율이 마음에 들었다.
바이올린의 소음이 귓속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좀 닥치세요.”
난 이어진 음악이 마음에 들어 싱긋 미소 지으며 담배 한 개비를 더 물고 불을 붙였다.
“이런 게 음악이다. 새끼야.”
Secret Garden의 Song from a Secret Garden.
선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게 어떤 악기 인지 나에게 묻는다면, 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모른다고.
베토벤의 운명, 합창. 슈베르트의 마왕, 그리고 다시 뉴에이지 음악으로.
The Planets라는, 악기 연주자들이 모여 앨범을 낸 연주곡들을 통째로 mp3에 넣었다.
잔잔하거나 거창하거나 어쨌거나, 연주곡이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시끄러워서 듣기 싫었다.
흡연실에서 4개비의 담배를 피운 후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짬뽕이나 먹으러 가자.
식당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짬뽕하나요~.”
속을 채우고 걸음을 옮겨 카운터 앞에 선 나에게 마주 선 남자가 말했다.
“7000원입니다.”
그게 뭔데?
난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운터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남자는 지갑을 보고는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어이없는 얼굴로 지갑에서 종이 7장을 빼내고는 입을 오물거렸다.
난 남자를 보고는 스윽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가게를 나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
2달 전.
‘그’가 돌아오지 않는 ‘나’는 어쨌든 이현식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되었다.
짜증 내고 칭얼거려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두 손을 올려 기브업을 외쳤다.
그런데, 그런데요.
난 유치장에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내려야 할 정거장을 잊어버렸다.
쌍욕을 뱉으며 지갑을 펼쳐 접어놓은 종이를 꺼내 읽었다.
정거장과 집 주소와 자신의 전화번호,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종이였다.
버스 기사가 나에게 조용히 하라고 외쳤고, 난 뛰어올라 기사의 면상을 차버렸다.
유치장에 들어와 쭈그리고 앉아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자, 나시에 청바지를 입은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시끄럽다며 날 쥐어박았다.
나는 팔뚝에 새겨진 문신에 주눅 들어 얌전해졌었다.
순경이 와서 밥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순대국밥을 주문한 나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짭짤해진 국물을 들이켰다.
유치장에서 나와 매일 저녁 2시간씩 걷기를 하던 5일 째날, 난 내 앞에서 길을 막는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얼큰하게 취했는지 비틀거리던 아저씨는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바닥에 구르던 짱돌 하나를 주워 그를 향해 힘껏 던졌고, 그 돌은 그의 어깨를 맞추고 떨어졌다.
억,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던 그를 지나쳐 다시 걷기 위해 다리를 뻗자, 도로 옆의 술집에서 3명의 남성이 나왔다.
바닥을 구르던 남자를 보고 나를 보던 3명의 남성은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날 향해 달려들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은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눈에 보이는 발목 하나를 잡고 이빨로 물었다.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더 세게.
입 안으로 비릿한 맛이 스며들어왔지만, 그 맛마저 맛있었다.
어머니가 내 앞에서 말씀하셨다.
제발.
걔 만큼은 못 해도, 조금만 참아주라고.
나는 허공을 바라보다 붉은 실이 뭉쳐 얼굴을 만드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눈, 코, 귀. 구멍은 모두 어둡고 공허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나와 많이 닮아있었다.
아니다. 더욱 닮은 이가 있었다.
그는.
“그래, 이현식이.”
나는 가면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대신해 볼래?”
가면이 슬며시 아래위로 끄덕였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간질이든 조현병이든 잡다한 것들은 내가 대처한다.”
가면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사람 상대. 어떤 것들이든 연결되어야 하는 건 네가 해. 원조의 기억과 감정, 느낌 꺼내보면 도움 될 거야.”
나는 그렇게 ‘가면’을 만들었다.
가면은 기억과 감정과 느낌 속에 남은 파편 중 ‘친절’을 모방하고 ‘미소’를 만들어서 밝게 말하는 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인격은 발악하고, 가면은 언제나 친절했다.
-
약봉지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내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게 다 맡긴다면서 왜 자꾸 불쑥불쑥 나오세요?]
“뭐가?”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누군가를 상대하는 건 저한테 맡긴다고 해놓고는 오늘도 할아버지 앞에 나왔잖아요.]
“몰라.”
주위의 사람들이 한 발짝씩 멀어졌다.
[... 모르겠어요.]
“뭘 몰라?”
나는 손으로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뺏다가 다시 꼽았다.
[잠시 기억 좀 보고 올게요.]
“빨리 와라. 정신없다.”
멀어진 사람들 대신 그 사이로 시끄러운 소리가 채워졌다.
이어폰에서는 캐논 변주곡이 재생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