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조건이 맞으면 스스로 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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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틀었다.
굿 윌 헌팅.
예전엔 그냥 “명작이라더라” 하고 지나쳤는데,
지금은 이상할 만큼 다르게 들어왔다.
줄거리를 길게 요약하는 대신,
내가 적어둔 메모들의 순서를 따라 자연스럽게 밟아가 보려고 한다.
내가 흔들리던 지점들과 겹치는 장면들,
그 장면 사이사이의 공기까지 모두.
처음 만남. 램보가 숀에게 윌을 맡기며 말한다.
포커처럼 빈틈을 보이지 말라고.
이 말이 왜 거기서 나오는지, 맥락이 분명하다.
윌은 폭행 사건으로 재판 중이었고,
램보가 법원과 협상하여
“수학 연구에 참여하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라는 조건으로 겨우 바깥에 세워둔 상태였다.
이전 상담사들이 윌의 도발에 연달아 무너졌다는 것도 램보는 알고 있었다.
세션이 깨지면 합의도 흔들리고,
그러면 윌을 학계로 끌어올리려던 계획 전체가 틀어진다.
게다가 램보는 관계를 본능적으로 협상 테이블처럼 본다.
약점을 감추고, 흐름을 내가 쥐어야 한다는 압박.
보호의 의도와 함께 영향력의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한 문장에 섞여 있었다.
둘만 남자 윌은 방을 한 바퀴 돌아가며 숀을 슬쩍슬쩍 찔러 본다.
책등을 훑다가 하워드 진 같은 이름들을 툭 던지고,
벽에 걸린 그림을 두고는 누구처럼 귀를 잘라 버릴 것 같다는 말을 던진다.
마지막엔 죽은 아내까지 건드린다.
그 순간 숀은 선을 긋는다.
“내 아내를 모욕했다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알겠어?”
경계는 분명하지만, 폭발로 관계를 박살내진 않는다.
윌은 사과 대신 “시간이 됐네요.” 하고 가볍게 밀려난다.
첫 만남의 공기는 그렇게 끝난다.
램보가 말한 “빈틈 보이지 말라”라는 조언과는 다른 방식으로, 숀은 분노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쪽을 택한다.
경계를 말로 세운 다음, 서두르지 않는 태도로.
한참 뒤 다시 마주한 자리에서 숀은 윌에게 말한다.
너는 아직 어리다고.
천재인 건 사실이지만,
인생의 희비와 타인의 감정을 모른 채 남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익숙한 아이일 뿐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네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는 건 결국 너 자신이라고.
그렇게 말을 남기고 물러선 뒤로는 긴 침묵이 이어진다.
몇 번의 치료 시간 동안 둘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같이 앉아 있는 시간.
그 침묵이 처음엔 공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사이에 큰일이 벌어진다.
‘여기선 나를 꺾으려 들지 않을지 모른다’라는 신호가 아주 천천히 쌓인다.
설명보다 공백을 먼저 놓는 사람.
나도 그걸 배우고 싶다.
전문성을 증명하고 싶은 조바심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 굳이 말을 더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을.
내 메모에는 그때 내가 떠올린 문장도 남아 있다.
“어차피 너한테 들은 게 없으니까
책 따위에서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우선 너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돼.
자신이 누군지 말이야.”
그 문장에 닿자, 숀이 상담사 이전에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 이야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그는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럼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느냐”라고 조용히 되묻는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내 과거를 무기처럼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 인간적인 온기를 숨기지 않는 사람.
공백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스스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
한편, 램보는 “숀이 윌을 쫓아냈다”라는 말을 듣고는 사무실로 들이닥쳐 언성을 높인다.
그걸 지켜본 윌은 다시 상담에 앉고,
거기서 영화의 심장 같은 장면이 나온다.
숀이 윌의 가정폭력 기록을 보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처음엔 윌이 비웃고 막아세운다. “그만하세요.” 숀은 목소리를 바꾸지 않는다.
같은 톤, 같은 문장, 점점 좁혀지는 거리.
한 번, 두 번, 열 번. 어느 순간 윌의 방어가 힘을 잃고, 그는 울면서 안긴다.
그 장면에서 나도 울었다.
상담 선생님이 떠올랐다.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던 목소리.
기술적 조언보다 먼저 도착하는 짧은 문장이 실제로 사람을 바꾼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 문장은 주문이 아니라 책임의 재배치다.
엉뚱한 방향으로 꽂혀 있던 화살을 제자리에 다시 돌려놓는 행위.
영화는 내 진로 고민의 축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램보는 이런 인재는 빨리 방향을 잡아 줘야 한다고 믿는다.
숀은 방향 제시와 조작은 다르다고 말한다.
결정은 본인이 하게 해야 한다고.
아직 과거도 정리되지 않은 윌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
이 대립을 보면서 한국의 교실과 입시가 떠올랐다.
너무 빨리 뽑고, 너무 빨리 배치하고, 너무 빨리 길을 정한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때때로 램보에 의해 ‘선택되는 사람’이 된다.
나는 그래서 더더욱 숀 같은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안내를 할 수는 있지만,
결정권은 끝까지 그 사람에게 남겨두는 어른.
속도를 빼앗지 않는 어른.
스카일라가 서부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 때, 윌은 믿지 못한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면 그 다음은 늘 배신과 버려짐이라고 믿어 왔다.
그는 소리치고,
스카일라는 끝까지 “널 사랑한다”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를 남기고 떠난다.
이 장면에서 내 과거 몇 장면이 겹쳤다.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문을 닫아 버리던 습관.
버려지지 않기 위해 더 빨리 떠나던 선택들.
두려움이 사랑의 반대말처럼 가장하던 순간들.
영화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럼 나는 거리를 없애는 법을 배워야 할까,
아니면 안전한 거리로 견디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까.
영화 속 마지막 포옹과 번호 교환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현실에서는 접촉 한 번, 문자 한 줄도
맥락과 합의, 기록 위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낭만을 핑계로 윤리를 덮지도,
윤리라는 말로 감정을 지워버리지도 않으려면 어디쯤 서 있어야 할까.
너무 가까우면 침범이 되고,
너무 멀어지면 서로를 잃는다는데,
그 사이를 실제로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규칙을 먼저 말로 세우고,
내가 흔들리는 날엔 잠깐 물러나 기록과 슈퍼비전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멋져 보이는 장면을 따라 하기보다,
무너지지 않는 온도로 가까워지는 방법을 천천히 익히는 게 맞지 않을까.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숀과 윌이 너무 닮아 보였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숀은 어쩌면 과거의 자신에게 말하듯 윌에게 말을 건넸을지도 모른다.
한때 자신이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했던 그 한 문장을,
자신에겐 늦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제때 건네 줄 수 있는 일.
타임머신 같은 상상은 한 줄로만 남겨 둔다.
중요한 건 상상이 아닌,
같은 자리에 서 본 사람이 건네는 말의 무게이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
정해진 교육과 실습의 틀 안에서만 상담을 해야 하는 걸까?
그 틀을 버티는 동안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 같은 순간을 꿈꾸는 게 오히려 현실을 흐리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먼저 챙겨야 하지.
말을 보태기 전에 옆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빨리 결론 내리기 전에 서로 안전한지부터 확인할 수 있을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를 쉽게 꺼내지 않으려면,
그 말을 떠올리기 전까지 같이 버틸 시간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내 과거는 필요할 때만 꺼내고,
내 얘기가 나를 과장하지 않게 스스로를 끝까지 감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질문.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뭐야?”
큰 답 대신 오늘은 짧게만 적어둔다.
서두르지 않을 수 있을까.
말이 막히면 설명 대신 곁에 있기.
경계는 말로 확인하고,
가까워지는 건 둘 다 괜찮다고 느낄 만큼만.
흔들리면 이 영화를 다시 볼까.
그 침묵의 시간과, 반복되던 한 문장,
마지막의 가벼운 등 토닥임을 떠올리면.
잠깐이라도 숨을 고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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