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미움이 순간적으로 뒤엉킴.
밤이 깊어질수록 화면은 더 파랗게 빛난다.
도시의 불빛은 유리잔에 남은 물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자막은 조용히 흘러간다.
“난 나에게 지쳤어.” 같은 문장이 지나가면 댓글창이 한순간 숨을 멈춘다.
누군가는 자기 안의 무너짐을 조목조목 고백하다가도, 조금 뒤에 이렇게 매듭을 지어 버린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봐.”
이 한 문장이 모든 걸 원래 서랍으로 밀어 넣는다.
복도에 떨어진 조각난 유리, 말라붙은 물기, 설명되지 않은 떨림들이 순식간에 ‘정상’의 방으로 회수되는 것처럼.
나도 그 서랍의 사용법을 너무 잘 안다.
낮엔 구멍처럼 비어 있다가도,
밤이 오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고,
결국 마지막엔 “피곤해서”로 덮어 버린다.
애증이 거기 있다.
이 문장 덕에 살아남았다는 마음과,
이 문장 때문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회의가 동시에 밀려 오는 것처럼.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어른이 되는 걸까.
우리가 ‘어른’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상 정당화의 문장을 정확한 타이밍에 꺼내는 기술이 아닐까.
회사에서 버틴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은 좀 힘들었다”라고 털어놓는 대신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라고 말하는 능숙함,
친구의 질문 앞에서 “요즘 마음이 이상하게 무겁다”가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거지, 지나갈거야.”로 감정을 항만에 정박시키는 습관.
그건 예의일까, 아니면 자신을 희석시키는 기술일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웠다.
울음을 줄이면 칭찬이 온다.
감정의 볼륨을 낮추면 “침착하다, 성숙하다”라는 칭찬 스티커가 붙는다.
그래서 고백보다는 정리, 절규보다 중간 결론이 호감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이 ‘중간 결론’이 반복되면 내 안의 경보음이 점점 작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촛불이 냉장고 속에서 미세하게 깜박이는 것처럼,
살아 있으나 주변의 온도에 길들여진 불.
‘피곤’은 종종 정확한 진단이지만,
동시에 모든 원인을 묻는 질문을 중지시키는 만능 키워드다.
몸의 언어를 존중하는 말이자,
마음의 언어를 검열하는 말.
댓글창을 스크롤하다 보면 두 부류가 번갈아 나온다.
호소하는 사람,
그리고 정당화하는 사람.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둘은 같은 사람이다.
같은 아이디가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얼굴을 번쩍인다.
“난 이 세상에 맞지 않는 것 같다.”라고 적어 내려가던 손이, 조금 뒤 “아냐, 다들 그러지 뭐.”라고 덧붙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마도 가면이 바뀐 것뿐이지 않을까.
혼자 있을 때는 금이 간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매끈한 면을 앞으로 돌리는, 그런 기술 말이다.
그 기술을 나는 미워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미워하는 쪽의 말은 이렇다.
그 가면은 결국 고통을 유예시킬 뿐, 해결하지 않는다.
오늘의 “피곤해서”는 내일 또 돌아오고,
사라지지 않은 흙탕물은 시간이 갈수록 더 냄새가 진해진다.
사랑하는 쪽의 말은 이렇다.
그 가면이 있어서라도 겨우 일을 하고,
겨우 사람을 만나고, 겨우 잠이 든다.
가면은 폭력이지만 동시에 생존 장치라는 걸.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욕하지 않도록,
당장의 소음을 줄여 주는 소음 차단기.
그래서 묻는다.
성숙은 언제부터 변명과 구분되는가.
“피곤해서 그런가 봐.”라는 말이 마음을 보호하는 자가진정인지, 진짜 해야 할 대화에서 도망치는 자가검열인지 어떻게 판별할까.
둘은 너무 비슷해서 종종 반대편으로 착시된다.
누군가가 겨우 꺼낸 호소를 “피곤한가 보네”로 대충 감싸 버리는 건 타인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일일 수 있고,
반대로 모든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며 주변을 산산이 깨뜨리는 건 자기만의 정의에 취한 파괴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어느 쪽에도 끝까지 서지 못한 채 흔들리는 중간에 남는다.
그 중간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한다.
크게 울지도 못하고, 완전히 침착하지도 못한 채,
그때그때 유리 같은 말만 갈아 끼우는 사람.
“괜찮아?”라는 질문을 들으면 내 속에서 두 개의 스위치가 동시에 켜진다.
하나는 “도와달라”라는 신호,
다른 하나는 “민폐가 되지 말자”라는 제동.
그리고 나는 늘 제동 쪽을 눌러 왔다.
도와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나를 설명하는 게 더 쉬웠으니까.
설명은 익숙하고 안전하다.
“오늘 피곤해서 그래”는 안전한 변명이고,
“사실 많이 아파”는 관계의 비가역성을 불러오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나를 꽉 붙잡는다.
그렇다고 해서 고백을 미루는 시간이 무한정 유효한 건 아니다.
미루는 동안, 감정은 모래처럼 쌓여서 무게가 된다.
어제의 피로, 그제의 피로, 지난달의 피로가 층층이 퇴적되어 지층을 만든다.
어느 날 발을 헛디디면 그 지층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그제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게 정말 피곤 때문이었나?”
만약 피곤이라면 휴식으로 회복되어야 하는데,
휴식이 오히려 불안을 키우는 밤이 있다.
침대에 누우면 귀 옆에서 어떤 문장이 웅웅거리며 돌아간다.
“네가 문제야.”
“넌 왜 이 정도도 못 버텨.”
“다들 이렇게 살잖아.”
이때의 피곤은 원인이 아니라 판결이 된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유죄 판결.
그러니까 나의 애증은 결국 나에게 향한다.
호소하는 나를 민망해하고,
정당화하는 나를 경멸한다.
어느 쪽이든 지나치면 보기 흉하다는 걸 알면서도,
정확한 중간을 잡는 일이 너무 어렵다.
낮에는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고,
밤에는 흙탕물의 냄새를 맡으며,
아침엔 다시 냉장고 속 촛불처럼 미세하게 빛나기.
이게 내가 아는 ‘어른’의 하루라면,
어른은 사랑받기 힘든 이름이다.
동시에, 이 ‘어른’ 덕에 오늘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미워하기도 어렵다.
그렇다. 애증은 늘 동시에만 참일 수 밖에 없나보다.
또다시 나는 명쾌한 해결책을 쓸 수 없다.
쓰는 순간 이 글은 설교가 되고,
나는 또다시 정당화의 편에 서게 된다.
다만 그저 기록하고 싶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라는 말이 우리의 공용어가 되어 버린 시대에,
그 말의 지시어가 정말 몸의 피곤인지,
아니면 마음의 포기인지 한 번쯤 구분하려 했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달라질지 않을까?
구멍은 보지 않으면 더 커지고,
흙탕물은 저절로 맑아지지 않는다.
가면은 오래 쓰면 얼굴 모양이 바뀌고,
냉장고 속 촛불은 결국 산소가 떨어지면 꺼진다.
나는 이 비유들을 들이밀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내 입술에 맴도는 “피곤해서”가 어느 쪽인지.
다시 화면으로 돌아온다.
노래는 끝나고, 추천 영상이 파도처럼 쏟아진다.
댓글창은 여전히 북적이고,
누군가는 긴 고백을 남기고,
누군가는 짧은 정리를 남긴다.
나는 ‘좋아요’를 누르지 못하고 화면을 끈다.
대신 방 안에 조용히 떠 있는 내 숨을 듣는다.
오늘도 나는 호소와 정당화의 사이,
그 흔들리는 난간 위에서 겨우 균형을 잡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마도 이 난간에서 떨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일 테다.
그렇다고 그 난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내일 아침에도 우리는 또 같은 문장을 꺼낼 것이다.
“그냥,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을.
사라지지 않은 구멍, 남아 있는 냄새, 꺼지지 않은 불.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끝끝내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때로는 나였으면 좋겠다.
아니면, 오늘 밤의 당신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