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계보

할머니의 다른 이름, 엄마.

by 미열 수선사

매년 이맘때면, 마음이 저릿해진다.

길가의 은행잎이 바람에 부서질 때면,

할머니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도 같이 흩어지는 것 같다.

그 소리를 붙잡으려 귀를 기울여보지만,

대신 들려오는 건 바람뿐이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딸아, 너는 죽을 때까지 할머니 이름을 잊지 말아 줘.

항상 기억하면서 살아줘.

엄마는 많은 사람이 기억해 줄 건데,

할머니는 엄마가 죽으면 더 이상기억해 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엄마가 너무 슬퍼”


엄마는 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래전 잊은 줄 알았던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날밤 엄마와 나는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처음으로 같이 울었다.


“엄마가 서른몇 살이었어. 그땐 아무것도 몰랐어.”

엄마의 목소리가 부서질 듯 떨렸다.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어.

엄마가 조금만 더 똑똑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할머니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이 말 끝에는 묵직한 자책이 섞여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나아지지 않는 마음의 흉터였다.


할머니는 내가 너무 어릴 때 떠나셨다.

얼굴이 흐릿하다.

목소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장면만은 뚜렷하다.

할머니는 항상 젤리를 들고 마중 나오셨다.

내가 차에서 내려 뛰어가면,

두 손에 젤리를 쥐고 활짝 웃으시던 모습,

그때의 햇살, 그때의 냄새.

그 모든 게 아직 내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엄마가 왜 할머니 이야기를 오랫동안 하지 못했는지.

너무나 보고 싶고 그립지만,

가슴이 아플까 봐 머리가 생각과 감정을 통제했던 것이다.

그걸 알게 되자,

어린 날의 무표정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가,

이제야 그 무지의 대가를 치르듯 매년 이맘때 울고 있다.


할머니, 그땐 제가 너무 어려서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어요.

이제야 그리움을 배웠어요.

그러니 한 번만 꿈에 놀러 와 주세요.

젤리를 들고 마중 나오시던 그 모습으로요.

제가 알아볼 수 있게,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다음 세대에게도 할머니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게.


“너의 자식도 할머니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해줘.”

엄마의 말이 가슴속에서 오래 맴돈다.

그리움이란 결국,

기억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내 아이가 생기면 이렇게 말하겠지.

“꼭 기억해 줘.

젤리를 들고 마중 나오던 엄마의 할머니 이야기를.

엄마의 할머니가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따뜻하게 살아 있다는 걸.”


기도가 할머니에게 닿았나?

유난히 추웠던 며칠 전 밤,

나는 꿈에서 할머니를 본 듯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손끝에 젤리의 단내가 맴돌았다.

아마 기억보다 오래 남을 사랑의 향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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