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적 꿈은 변함없이 똑같았다. 난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했었다.
물론 그건 어렸을 적 이야기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달랐다. 한국의 고3. 벌써 12년째 지긋지긋한 교육과정을 밟아오며 내 꿈은 점점 희미해졌다.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그려둔 꿈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그래, 나에게 학교는 빗물이었다.
난 극도로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싫어했다. 왜 다녀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굳이 내 에너지를 써가며 사람 많은 공간에 낑겨 있는 게 싫었다. 낑긴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진짜 공간이 좁다는 게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 못지않게 뒤엉킨 관계들 사이에 끼여있는 게 싫었다는 뜻이다. 쉬는 시간에 사람이 몰리는 복도에 나가는 것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넓었지만, 좁았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난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키를 가지지도 않았다. 다만, 눈에 띄는 꿈이 있었을 뿐. 모두가 내 꿈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내 성적에. 비웃음을 사는 건 이제 별 일도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은근히 비웃음거리가 되어왔다는 사실에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걸까. 그들은 내 꿈을 비웃을 자격이 있긴 한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야겠다 다짐한 게, 아니, 이미 난 우주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쓰라리게 아팠다. 뭐가 그렇게 아팠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 날부터 없는 사람인 듯이 살아갔다. 아무에게도 내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공부했었다. 시간이 흘러 이 순간이 지나갔을 땐 부디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기억도 감정도. 나에게 없었던 시간 같은 어떤 한 때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겐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수능을 망쳤고, 수능을 준비하는 내내 상당히 눈에 띄는 학생이 되어버렸고, 모두가 내 수능 점수에 관심을 가졌다. 죽고 싶었다. '그렇게 노력해 봐야 뭐 하냐고, 어차피 망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날 따라다닌 꼬리표였다. 정말 죽고 싶었다. 우주의 먼지이고 싶었다. 학교라는 비가 점점 거세게 내려 분필 자국을 흔적도 없이 씻어 내렸다.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란 듯이. 나에게 학교는 매정한 곳이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고, 그토록 바라던 졸업식 날이 되었다. 예행연습이라더니 그대로 졸업식을 끝내버렸다. 홀가분할 것만 같았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 감흥도 없었다. 이 날은 혼자 찍은 사진도 없을 정도로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지나간 하루였다. 단지 내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졸업식 같은 건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랬다. 난 졸업을 했고, 성인이 되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던 그곳과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
고3으로, 수험생으로 1년을 살아가며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했었다. 겨울이 지나고서야 봄이 오듯, 장애물을 넘었기에 결승선의 가치가 도드라지는 것처럼 앞으로 좋은 일만 있으려고 이렇게 힘든가 보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이렇게 하얗고 황량한가 보다. 앞으로는 봄이 올 날만 남았겠지..
하지만, 폭풍우는 생각보다 거센 바람이었다. 나에게 내밀어준 손을 잡을 수 없었을 정도로.
내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지 못했다. 알아봐 주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참 푸르게도 맑았다. 내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될 때쯤 그 위엔 하늘처럼 푸른 장미가 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가 피면 하나하나 예쁘게 포장해서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늦은 감사인사지만, 내 곁에 있어준 그대가 내 용기였다고, 알아봐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옆에 있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짧은 편지와 함께.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되돌아보면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지 못했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커튼이 쳐진 내 창가에는 늘 비바람이 불었다. 용기를 내어 커튼을 걷고 푸른 하늘을 바라봤더라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손을 내밀어 손 끝으로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봤더라면 좋았을걸..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도, 모래 위로 밀려오는 포말도, 노을 지는 하늘아래 예쁘게 반짝이는 윤슬도 그리웠다. 푸른 바다에 하염없이 잠기고 싶고, 맨발로 해변을 따라 걸으며 생각에 빠지고 싶었다.
난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늘 이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다. 꿈을 잃은 나는 바람에 씨앗을 날려 보내고 남은 민들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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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시 민들레가 되어보기로 했다. 다시 꽃을 피워 볕이 좋고 바람이 따스하게 부는 날 씨앗을 날려 보내고 싶었다. 그럼 그 씨앗이 또 다른 민들레를 피워내겠지.
내가 날려 보낸 씨앗은 어떤 민들레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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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파동처럼, 시작의 도미노처럼, 잔물결의 바람처럼 그리고 민들레처럼 하염없는 끝을 만들어내고 싶어졌다.
나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고, 그게 바로 이 책이다. 누군가에겐 고리타분한 타인의 이야기쯤 일지 몰라도 나에겐 가장 진심을 담은 무채색의 책이다. 어느 한 명이라도 이 책을 읽고 '색'이라는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면, 그래서 내가 그의 용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