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 공간_01
아늑한 공간을 찾다가, 운 좋게도 문 닫은 카페 하날 발견했습니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중턱, 차로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홀로 세워진 건물입니다.
며칠씩 외출도 하지 않고 오롯이 글에만 몰입하는 나에겐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공간입니다.
포근하게 감싸 안기듯 편안하고 조용한 느낌입니다.
이 공간을 서재 겸, 간단하게나마 생활도 할 수 있도록 꾸밀 생각입니다.
나무 바닥은 결이 살짝 뒤틀려 잘못 밟기라도 하면 삐걱거리기도 합니다.
그곳을 손으로 살짝 들어보니 들리기도 합니다.
생각보다 낡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엔 깨끗하고 좋습니다.
주방과 화장실은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고, 테이블과 소파는 모두 치웁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공간입니다.
어느 정도 정리되자, 침대가 들어오고 책상이 놓입니다.
몇 년째 쓰고 있는 낡은 노트북을 올려놓고, 여기저기 보이는 자리마다 책을 쌓아놓으니,
이제 얼추 『작가』의 서재 같아 보입니다.
벌써 이 공간에 흠뻑 정이 갑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커다란 유리 외벽입니다.
밖을 내다보면 작은 숲의 꼭대기가 보이고, 그 너머로 도시가 보입니다.
그 앞에 누워있으면 청아한 하늘의 구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면, 푹신한 구름과 함께 하늘을 두둥실 떠다니는 착각마저 듭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그 공간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있습니다.
# 공간_02
『화가』인 그녀는 유리 외벽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에 매료되어서,
그 하늘을 배경으로 커다란 날개를 가진 여인을 그리고 싶어 합니다.
유리 이화(Hinterglasmalerei)입니다.
그녀가 종종 유리에 그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흔히 보지 못했던 화법에 가만히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으면,
내게도 그리는 방법을 알려줘서 함께 그리곤 했습니다.
잘 그린다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리던 작은 유리판과는 달리, 이번엔 꽤 큰 화폭입니다.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마냥 행복해 보입니다.
곧바로 수많은 미술도구들은 유리 외벽 앞에 놓였고,
그녀는 며칠씩 머물면서 그림을 완성해 나갑니다.
하지만 어느 날은 조금도 그려내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런 날이면 종일 내 곁을 맴돌며 놀아달라고 합니다.
할 일이 많아 모른 척하면, 이내 토라져서 어딘가로 숨어버립니다.
이 공간엔 숨을 곳도 없는데 고양이처럼 여기저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잘 숨고는,
찾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거기 머리카락 보여."
찾아내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나옵니다.
아이처럼 투정을 부립니다.
“삼 분! 자그마치 삼 분이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분명 사랑이 식은 거야.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 긴 삼 분 동안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왜 날 못 찾고 헤매는 거야?”
장난으로 우깁니다.
이쯤 되면 방법이 없습니다.
"쪽."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면 그녀는 맛을 보듯 입술을 오물오물 거리며 조용해집니다.
하지만 곧 성에 차지 않는지 다시 종알거립니다.
"이런다고 내가 용서할 줄 알....."
그러면 한 번 더 쪽.
"자꾸 이럴...."
그래도 안 멈추면 또 한 번 더 쪽.
결국, 그녀가 웃으며 내 품으로 파고듭니다.
이번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잡고는 눈을 맞추고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근데, 너무 뜬금없지 않아? 갑자기 이러는 거.”
동시에 그녀의 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내 손도 멈춥니다.
뜬금없다.
뜬금없다.
“아니, 자연스러운데?”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가 살짝 눈을 흘깁니다.
기다렸다는 듯 멈춰있던 손은 다시 움직입니다.
길고 깊은 입맞춤을 나눕니다.
올려 묶은 머리카락 뒤, 목선을 따라 입맞춤을 이어갑니다.
그녀는 짧고 깊은숨을 내쉬고는 견딜 수 없는 듯 온몸에 힘을 주며 내 목을 감싸 안습니다.
입고 있던 블라우스가 흘러내리고,
잘록한 허리를 타고 돌아 올라간 손은 자연스럽게 브래지어의 훅을 풉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수야.”
“뭐가?”
“매번, 너무 자연스럽게 풀어내잖아. 혹시, 여자들 많아?”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도 보통, 다른 남자들은 어려워하던데?”
“다른 남자들이 어려워하는 건 어떻게 알아?”
“응? 그, 그러니까....”
잠시 모든 걸 멈추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둘 다 얼굴 가득히 장난기가 퍼집니다.
“질투야?”
그녀가 웃으며 묻습니다.
“그래, 질투다.”
"거짓말.... 질투 안 하면서...."
그녀는 가늘게 실눈을 뜹니다.
내 입가엔 미소를 잔뜩 어립니다.
마치, 결투를 앞둔 사람들 같습니다.
내가 먼저 그녀의 빈틈을 발견하고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달려듭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은은하게 울립니다.
아무래도 원고는 내일 넘겨야겠습니다.
# 공간_03
“부끄러웠는데, 이젠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좋기만 하니…… 나, 이래도 되는 걸까?”
한차례 사랑이 몰아친 뒤, 허공에 시선을 잡아둔 그녀가 혼잣말처럼 속삭입니다.
사랑을 나눴던 날들이 늘어감에 따라, 생각도 많아지나 봅니다.
“나보다도, 내 몸이 먼저 자기를 기억하는 것 같아. 그건 좀 두려워.
사랑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서.”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대답을 찾습니다.
뭐라도 대답해야 할까?
곁에 두었던 애꿎은 전화만 만지작거립니다.
“내 전화기 가지고 뭐해……”
“문자 보내.”
“누구한테?”
“나한테.”
“그게 뭐야…… 뭐라고 보내는데.”
“우리 만날까?라고”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쉽니다.
“자기는 이런 이야기 싫지?”
“어? ‘우리 만날까?’ 이거 예약 발송으로 보내졌다.”
끝까지 딴청을 피우자,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 옵니다.
알겠으니 그만하겠다는 말입니다.
“나, 이제 졸려.”
살며시 그녀는 눈을 감습니다.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이미 잠에 취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재워야지 하면서도 재우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 보자고 했던 영화 볼까?”
말을 붙여 봅니다.
그녀의 감긴 눈이 살짝 떠지는 듯하더니 이내 스르르 감깁니다.
마음과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나 봅니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 두 눈에 입을 맞춰 줍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술만 조물조물 움직입니다.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제대로 듣지 못해 귀를 가져가 대봅니다.
허공을 떠도는 공기의 소리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주위가 조용해지자, 잠에 취한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졸리다고.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눈을 감은 채 그녀도 따라 웃고 있습니다.
참 맑은 미소입니다.
마치 천사 같습니다.
이런 천사가 지금 내 옆에 누워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립니다.
그래도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묻습니다.
작고 차분한 숨결이 느껴집니다.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내 품 안에서 그녀를 재우고 싶습니다.
# 공간_04
새벽부터 내린 비가 오후까지 이어집니다.
비는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는데, 그 슬픔이 싫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일부러 슬픈 영화를 찾아 보고, 슬픈 음악을 찾아 듣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슬퍼지려 함이 아닌, 그로 인한 재미를 얻기 위해섭니다.
때론, 슬픔이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더 철저히 슬퍼지고 싶어 집니다.
이 감정을 따라 깊은 바닥까지 파묻혀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글귀를 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에 좀 다녀올게.”
비에 흠뻑 취해있을 무렵, 펼쳐 놓은 짐들 사이에서 우산을 찾던 그녀가, 며칠 만에 집엘 다녀오겠다고 합니다.
“갑자기 왜?”
“그냥.”
“그러니까 갑자기 그냥 왜?”
기분에 취해있어서일까? 진한 우울함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쌉니다.
“집에도 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갈아입을 옷도 이젠 다 떨어졌고.”
그녀는 지금, 그동안 입었던 옷들을 커다란 가방 안에 차곡차곡 챙겨 넣습니다.
그렇게 짐을 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는 사람 같아 보입니다.
그 모습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치 버림받는 기분입니다.
이런 기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왈칵하고 목이 멥니다.
숨쉬기가 힘듭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한 상상들이 머릿속에 파고들어 옵니다.
생각은 점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릅니다.
비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헤어지기 싫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이래서 결혼을 하나 봅니다.
사랑해서만이 아닌, 헤어지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도, 결혼을 하나 봅니다.
“살까?”
작고, 짧은 한 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를 세웁니다.
그대로 멈춰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지만, 대답도 없습니다.
듣지 못한 걸까? 한 걸음 다가가 다시 한번 묻습니다.
“같이 살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개 숙인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
침묵이 흘러 목을 조릅니다.
끝.
왜 그 단어가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의 세포를 잠식하며 밀려옵니다.
장난으로 시작한 이야기에 흠뻑 빠진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듯 이미 제정신이 아닙니다.
간신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뒤 돌아 서 있는 그녀를 있는 힘껏 끌어안습니다.
“갑자기 왜 그래?”
“가지 마.”
“자기야, 나 숨 막혀. 슬퍼? 왜 슬퍼? 나 좀 봐봐.”
평소와 사뭇 다른 내 모습에 걱정이 되나 봅니다.
어떻게든 한걸음 물러서서 내 얼굴을 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엉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미친놈처럼 목놓아 울지도 모릅니다.
무슨 감정인지 설명조차 못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힘껏 다시 한번 더 끌어안습니다.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만 내 품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착각이 듭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안고, 또다시 안아 봅니다.
어느새 두 팔 가득, 잔뜩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내가 안쓰러운지, 그녀도 이제, 진정이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기로 했나 봅니다.
한걸음 물러서려는 팔을 풀고 오롯이 내게 기대어 안깁니다.
어디선가 열어놓은 문틈으로 비릿한 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들어와 부둥켜안은 우리를 감싸 흐릅니다.
굵은 빗줄기가 흘러내리는 유리 외벽에 그 모습이 비칩니다.
그 옆으로 미완성의 날개가 절묘하게 뒤엉켜 펼쳐져 있습니다.
날개를 활짝 편 천사가 눈을 감고 비통해하는 여인을 끌어안고 있는 그림처럼 보입니다.
천사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어립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미소는 아닙니다.
어딘지 슬퍼 보이는 미소입니다.
어딘지 슬프지만 즐거워 보이는 미소입니다.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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