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02예감

After The Ending Credit

by 감성현

After The Ending Credit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영화가 계속된다면 그들의 삶은 행복할까?

당신이 사랑이라 믿은 잔혹한 진실


글·사진 감성현







# 예감_01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씁니다.

글이라고 하기엔 짧은 단상에 가깝습니다.

다양한 인물과 대사. 그리고 상황이 떠오르는 대로 적히고 있습니다.

일단 ‘적는다’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면, 깊은 생각은 그때부터 하게 됩니다.

퍼즐처럼 하나의 흐름을 따라가며 적어놓은 단상들을 묶어 냅니다.

이러한 단상들은 휘발성이 강해 금세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하나라도 놓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있는데,

갑자기 요란스럽게 전화가 울립니다.

흐름이 깨지기 때문에 전화를 꺼 놓는데, 깜빡했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전화를 받지 않지만, 이번엔 『녀석』입니다.


녀석은 어려서부터 어울렸던 동네 친구입니다.

녀석에게 고추가 달려있다면 불알친구라고 했을 겁니다.

나와 달리 활달했던 녀석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놀자고 찾아왔고,

우리는 매일같이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동네 어귀를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녀석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봉긋하게 가슴이 솟고, 허리는 잘록해졌습니다.

활달했던 성격도 차분하게 변했습니다.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너 브래지어 안 했어?”

수업을 마치고 녀석의 집에 잠시 들렀던 날입니다.

속이 비치지 않는 옷이긴 했지만, 평소와 분명 달랐습니다.

등 뒤에 아무런 돌기가 없었고, 너무도 매끈하게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집이잖아.”

녀석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당황하지도 않습니다.


“그게 얼마나 숨통을 조이는지 알아? 집에서까지 그걸 입고 있어야 하겠니? 넌 남자라서 모르지.”

“누군 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하던데.”

“누가 그래? 데리고 와 봐. 한 대 콱 줘 박아 버리게.”

“그렇게 싫으면 평소에도 하지 말고 다니던지.”

“내가 미쳤냐? 누구 좋으라고? 세상에 얼마나 미친놈이 많은데!”

“그럼 난? 난 괜찮고?”

열변을 토하던 녀석이 입을 다물고 침묵합니다.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눈치를 살피는데, 괜찮은 듯 미소를 머금고 날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남자들이 다 너 같지 않아서 그래.”

그건, 주문이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던 늦은 새벽,

무섭다며 불러내 함께 잠들었을 때도,

여자끼리 가는 거라며 속이고 함께 배낭여행을 갔을 때도,

일일이 셀 수 없는 수많은 일상의 상황 속에서도.

그날의 그 주문은 날 세상의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묶어 두었습니다.


세상의 남자들이 다 너 같지 않아서 그래....






# 예감_02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잤어?”

술을 마신 듯, 평소보다 상기된 목소리입니다.


“아니.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 전화도 바로 안 받고 그래? 한참 울렸다고.”

“이 시간에 생각할 게 달리 뭐 있겠니?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 나가고, 마무리는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지.”

짜증이 납니다.


“아, 글 쓰고 있었구나? 미안……”

녀석이 미안해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나 역시 미안해집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세 시를 조금 넘긴 시간입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습니다.

행여나 깰까, 목소리를 낮추고 녀석과 대화를 이어갑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그냥, 기분이 꿀꿀하고 그래서 그래…… 나 지금, 술 마시고 있는데…… 나올 수 있어?”

원래 이렇게 늦게까지 나와 있는 녀석이 아니라서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혼자 남겨두고 가기가 뭣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그녀가 일어나 앉아있습니다.

아무래도 녀석과의 통화가 깨웠나 봅니다.

목소리 없이 입술로만 내게 ‘누구?’라고 묻습니다.

나도 따라 ‘친구’라고 입술로만 대답합니다.


“알았어. 기다려.”

녀석과의 전화를 끊습니다.

돌아본 그녀가 어둡습니다.

화가 난 걸까? 아닙니다. 화난 표정은 아닙니다.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얼굴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없습니다.






# 예감_03


“녀석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봐. 같이 술 마셔 달라네.”

상황을 설명합니다.

괜찮다며 가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합니다.


“어디 가려고?”

“집에.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신경 쓰지 마.”

“이 시간에?”

대답을 미소로 대신합니다.

힘없는 미소입니다.


“그러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택시 있어. 그러지 마. 기다리잖아. 친구.”

말투가 이상합니다.

불안하고 차갑습니다.


“자기야…… 아니, 아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곧 입을 닫습니다.

그러고는 내 앞으로 가로질려 먼저 밖으로 나가려 합니다.

팔을 붙잡고 세웁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괜찮아 말해.”

“아니야, 어서 가. 그 친구 많이 기다리겠다.”

“괜찮아. 기다려도. 하려던 말, 해봐.”

“그냥…… 그 친구라는 사람…… 여자야?”

살짝 당황스럽습니다.

뜻밖의 물음입니다.

그날, 그 주문에 걸린 후로 지금까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녀석을 남자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물음엔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기에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망설인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괜한 걸 물어봤다는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친구야.”

결국,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으로 그녀를 붙잡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 그녀는 체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많이 취한 거 같아서 그래. 챙겨서 집에 보내고 금방 돌아올게.”

“알았어. 잘 다녀와.”

“집에 가지 말고. 다녀와서 같이 아침 먹자.”

“봐서.”

그 말이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가지 말까?”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립니다.

녀석입니다.

그녀는 어서 가보라며 등을 떠밉니다.

지갑과 차 키를 챙겨주고, 구두도 챙겨줍니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말라는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흔들지만,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입니다.

감추지 못한 어두움이 맴돌고 있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 예감_04


녀석이 알려준 포장마차에 도착하자,

한쪽 구석에서 혼자 술 마시고 있던 녀석이 번쩍 손을 들고 날 반깁니다.

멀쩡한 듯 보이지만, 많이 마신 듯합니다.


“안주라도 좀 챙겨 먹으면서 마시고 있어? 안 그러면 속 버린다.”

자리에 앉으면서 녀석의 입 앞에 안주를 하나 넣어 줍니다.

동그란 두 눈을 껌뻑 껌뻑거리며,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넣어주는 안주를 받아먹습니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잔을 비우고, 잔을 채우고, 또 잔을 비웁니다.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눈이 점점 붉어집니다.

그러다 결심이라도 한 듯 비장한 얼굴로 채운 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죽을 테야.”

호흡이 곤란한 듯 잔기침을 해댑니다.

내가 오니까 어리광을 부리고 싶나 봅니다.

하지만 어리광치곤 너무 못돼서, 받아주지 않기로 합니다.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자기 목을 졸라서 죽을 수 없거든.

그전에 본능적으로 손이 풀리게 돼 있어.

그리고 사람이 목이 졸리면, 뇌에 피가 안 통해서 죽는 거지,

지금 너처럼 호흡 곤란으로 죽는 게 아니야.

차라리 내가 가슴을 강하게 눌러줄까?

그러면 폐가 움직이지 못해서 숨을 못 쉬거든.

“……”

“그러니까 너, 억지로 숨 참고 있지 말고 그냥 숨 쉬어. 그 의미 없는 손도 내리고.”

“이씨, 그걸 안 받아주냐? 밉다. 정말 밉다.”

녀석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잔을 듭니다.

그 잔을 바로 빼앗아 내가 마셔버립니다.

녀석은 눈앞에서 비워진 술잔을 한참 바라보더니,

살짝 콧방귀를 뀌고 옆에 있는 술병으로 손을 뻗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잔이었는지 이미 술병은 텅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들고 있던 술병을 높이 들어 또 한 병을 시킵니다.


이번에도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잔을 비우고, 잔을 채우고, 또 잔을 비웁니다.


한 잔.

그리고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무슨 여자애가 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냐? 이제 그만 마셔.”

“여자? 누가 여자야? 내가? 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로 본 적도 없으면서. 새삼 왜 그러셔.”

그렇게 말하고는 비워진 잔을 다시 채우고 한입에 털어 넣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또 한 잔을 따릅니다.


“아 좀! 그럼, 천천히 마시던 가.”

결국, 성을 내며 녀석의 술잔을 빼앗습니다.

놓지 않으려는 녀석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술잔을 쏟습니다.

순식간에 녀석의 움직임이 멈춥니다.

쏟아진 술이 녀석의 치마를 천천히 적십니다.


“지금…… 우니?”

고개를 숙인 녀석이 젖어드는 치마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러다 녀석은 앙칼진 목소리로 치마 끝을 쥐고 흔들며 고함을 쳐대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우냐고? 지금 우냐고!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우냐고! ”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리고는 빼앗긴 술잔은 버려둔 채, 술병을 통째로 들고는 벌컥벌컥 들이켭니다.


“야! 이 미친…… 그만 좀 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술병을 빼앗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허우적거리며 내게 어린아이 마냥 두 손을 뻗고는 술병을 달라고 보챕니다.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술병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술병을 내주지 않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맙니다.


“이러지 마…… 너까지 나한테 이러지 마……

좀 잡게 해줘. 붙잡게 놔둬.

그 사람처럼…… 너까지 나한테 이러지 마……”

목이 메어오는 것을 억누르며 힘들게 말해 놓고는,

그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서러웠는지 결국엔 소리 내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립니다.


녀석이 이별을 했습니다.


녀석을 바라봅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셔봅니다.


이런 녀석의 모습이 낯섭니다.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울게 내버려 둡니다.

가슴속의 모든 슬픔이 다 쏟아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난 뒤에, 녀석은 그대로 잠들어 버립니다.


녀석이

이별에

슬픔에


울다 지쳐 잠듭니다.






# 예감_05


녀석을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옷을 벗는데 유리 외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누군가가 보입니다.

분명 그녀는 침대에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침대엔 아무도 없습니다.

잘못 봤나 봅니다.


“늦었네? 금방 온다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손을 멈추지 않고 묻습니다.

하얀 깃털로 가득 채워진 커다란 날개였는데, 한쪽이 검게 덧칠해지고 있습니다.


“미안. 녀석이 많이 취해서.”

미안한 마음에 한 걸음 다가가 살며시 안아봅니다.

작은 어깨가 품 안으로 쏙 들어옵니다.


“그래서? 취해서? 그래서 어쨌는데?”

칼날 같은 말투입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정신까지 혼미해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가 맞나 싶습니다.


“질투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평소처럼 장난을 걸어봅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을 안 합니다.

그대로 서서 침묵합니다.


“냄새나.”

한참 만에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침묵보다 낫기에 그 말의 끝을 붙잡고 어떻게든 말을 이어나가 봅니다.


“냄새나? 술을 조금 쏟았거든.”

“아니, 그 냄새 말고, 다른 냄새.”

너무나 낯선 말투와 모습입니다.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녀를 어딘가에 숨겨놓고 그녀로 변장한 채 속여대는 것만 같습니다.


“다른 냄새…… 다른 여자 냄새가 난다고.”

낮고 조용한 말투에 소름까지 끼칩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른 여자 냄새라니.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래? 친구라고 했잖아.”

“아니다. 미안, 나, 너무 속 좁게 보이겠다. 그만 가볼게.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어.”

그리고 침묵합니다.

침묵은 너무도 흔한 말입니다.

사랑보다도 더 흔한 말입니다.

왜 침묵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집에 다녀오겠다고 할 때, 붙잡지 말 걸 그랬습니다.

다녀오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후회됩니다.

그때가 후회됩니다.

자꾸만 후회가 돼 미치겠습니다.


그녀가 숨어버렸습니다.

바닥 깊숙이 스며든 듯, 그림자조차 감춰서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지친 마음을 낡은 나무 바닥에 눕히고 유리 외벽을 바라볼 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은 하얗고 반은 검은 날개가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선과 악의 모습 같습니다.

미완성인 채입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멈춰있을 겁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녀를 찾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찾아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원하지 않나 봅니다.


고양이처럼

그녀가 숨어버렸습니다.








스토리디렉터 감성현의 신작 | <19 씩씩하게 아픈 열아홉>

육체적 고통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다룬 이야기.


"어른도 아니도 아닌, 열아홉.

달리기를 좋아하던 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었다."


기억할게.

내 첫 기억.

내 기억 끝까지.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6371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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