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을 소재로 한 체험형 전시에 다녀왔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캄캄한 곳에서 1시간을 넘게 걸어야 했다.
자기 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곳은 그런 적응시 같은 것도 전혀 없다. 내 내면을 묘사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캄캄한 곳에서 눈을 뜨고 있으니 너무 어지러워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지러우시죠? 눈을 감는 게 더 편하실 거예요. 어두운 곳에서 인간의 눈은 본능적으로 빛을 찾거든요."
전시를 체험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길을 안내해 주는 시각장애인 직원분께서 이쯤인 걸 예상하신 듯 안내멘트를 하셨다.
눈을 감았더니 어지러운 게 사라졌고, 그 후로 전시회 출구를 나올 때까지 계속 눈을 감고 걸었다.
처음에는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어차피 눈을 떠도 상황은 똑같았기 때문에 금방 익숙해졌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니 출구에 나갈 땐 빛에 다시 익숙해져야 했다. 전시가 끝나는 공간에서는 아주 조도가 낮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에서 바로 밝은 빛으로 나가면 놀랄 수 있기 때문에 여기는 조금 어두워요. 올라가시면 밝아질 거예요."
삶은 불행의 연속이다.
나는 너무나 불행해서 행복한 순간이 올 때마다 이질적이었다.
늘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막상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인식하게 됐을 때는 너무 불안했다.
내가 행복한 순간이 올 때마다 꼭 내 것이 아닌 걸 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금방이라도 다시 빼앗길 것만 같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웃고 떠들다 집에 돌아오면 그 대비감은 더욱 극명하게 느껴져서 더 공허해지곤 했다.
웃음은 내 통장에 찍히는 월급처럼 그저 스쳐 지나갔고, 다시 남은 불행만이 나의 온몸으로 끌어안아졌다.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사람만 만나고 오면 죽고 싶었다.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면 진짜 나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우울에서 나아진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몰랐기 때문에 난 내 우울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이 쪄도 안 됐고, 자해 상처로 얼룩져있어야 했고, 이게 무슨 기분인지 설명하는데 애써야 했다.
남들이 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할까 봐 들키기 싫었던 것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아지는 내가 싫은 그 감정까지도 나아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우울하고 캄캄한 것에 너무 오래 잠식되어 있던 탓에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는 것도 적응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그러다 어쩌면 행복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행한 건 나고, 행복한 건 내가 아니라는 식으로 굳이 인정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 불행에 비교해서 내 처지가 더 낫다는 식의 위안은 별로다.
내가 괜찮다는 걸 증명해 줄 기준은 오직 어제의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제보다만 나으면 되는 사람처럼 산다.
100억 복권이라도 당첨되지 않는 한 갑자기 뿅 행복해지는 법은 없다. 내 삶의 조도를 천천히 올려나가면 된다.
(사실 100억 복권에 당첨된다 해도 고장 난 내 뇌 호르몬을 고쳐주진 않기 때문에 드리워진 우울은 여전할 것이다.)
물론 내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고통은 불가피하다 해도 괴로울 것이냐 자유로울 것이냐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캄캄한 전시에서 눈 뜨기를 포기하고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 삶의 키맨은 언제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