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었던 유년과의 작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느 시절이 하나 끝이 났다. 외할머니는 평생 글도 배우지 못했다가 어르신들이 다닌다는 노치원에서 글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셨다. 글도 처음 배우시고 이름도 쓰시고 종이꽃을 이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거시고는 아이처럼 웃으셨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색연필로 색칠해 보여주시던 소녀같은 모습이 아직 선하다.
외할머니는 17살에 시집와 7남매를 두셨다. 농사일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 많은 땅과 산과 일꾼들의 삶까지 다 챙기셔야 했다. 내리 딸을 낳아 구박만 받던 큰며느리였다. 아들을 낳으니 아들이 하나라 죄인이었다.
집안을 건사하느라 아흔 평생 그 동네를 벗어나신 건 제주도 여행 서너 번, 부산 여행 서너 번, 큰 지방으로의 병원 외출이 다다. 외할머니는 평생을 그 집과 함께 사셨다. 윗채에 있던 잠실에서 누에를 치고 봄이 되면 밭을 갈고 여름에는 논농사를 돌봤다. 가을이면 곶감을 만들고 치매에 걸리신 시어머니까지 보살피셨다. 조선시대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들의 할머니, 외할머니는 그런 삶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 그대로 온 생을 땅과 자식들을 키우는 데 평생을 갈아넣으셨다.
그 외할머니의 가장 큰 외손녀인 나는 유치원을 외가에서 다녔다. 유치원을 마치면 밭이든 논이든 외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감기라도 들면 외할아버지는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섬에 있는 병원을 오갔다. 그렇게 외가에서 길러진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공부하느라 직장다니느라 바쁘던 나는 늦은 결혼에 3번의 습관성유산으로 힘들어하다 딸아이 하나를 겨우 낳았다. 5년 전, 그 아이를 안고 외할머니를 뵈러 갔다. 쑥부쟁이가 뒤덮인 밭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이야기하셨다.
"꽃이 이쁜데 눈에 다 못 담겠네, 꽃이 젤 이쁘지.
그리고 꽃 중에 사람 꽃이 젤 이뻐."
나와 아이를 그리 아끼시던 외할머니가 아프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간염이 간경화로 그리고 간암으로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셨다. 요양병원에 며칠 계시다 입원을 거부하시고 죽어도 제집에서 죽겠노라 외갓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고 곡기를 끊으셨다. 수액을 맞는 것도 거부하시고 숟가락으로 미음이라도 떠넣으려하면 입을 굳게 다무셨다. 그러기를 두어 달,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한 사람이 오고, 그 사람이 간다. 하나의 우주가 사라졌다. 그리고 평생 일군 산으로 돌아가 산에 누우셨다.
살면 살수록 이별이 늘어난다. 당연하지만, 매번 이별은 익숙하지 않다. 다섯살인 아이에게 왕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고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그저 이제 왕할머니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라 이야기해줬다. 그 말만으로도 아이는 울먹인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걸 아이는 식당에 다녀온 거라 이야기한다. '죽는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냥 사라진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아이는 알까.
48색 크레파스를 너무 갖고 싶어하던 밤이 있었다. 그걸 가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꽉 찼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순간이 처음이었던 유년 시절도, 90년을 살아왔던 외할머니의 생과 함께 사라졌다.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온몸에 새겨진 그 시간들은 이제 아이에게 전해지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