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꽃, 사람
기찻길 옆 주인 없는 길쭉하고 좁은 땅에 옥수수 호박 시금치 상추 고추 등을 키우는 할머니 있다
어느 해엔 이곳에 <경작 금지> 푯말이 섰는데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그러거나 말거나 매일 개울에서 물을 길어다가 물을 주고 풀을 뽑고 했다 막무가내 들어선 푯말 따위가 작은 할머니를 차마 침범할 수는 없었다
또 어느 해엔 <경작 금지> 현수막이 크게 둘러져 - 그 현수막은 경고성이 아니라 진심으로 보였으므로 이제 더는 진짜로 할머니를 볼 수 없겠거니 하였지만 봄이 되자 현수막 안쪽에서 무언지 모를 싹이 움찔움찔 돋았고 나는 다시 물을 길어 나르는 할머니를 보았다 여름이 되자 옥수수가 현수막을 보란 듯이 무시했고 호박도 마찬가지였다
봄이면 찔레꽃 환히 피고 여름이면 사위질빵 무던히도 흘러내리고 가을이면 노란 산국 그윽한 향 짙어지던 철길 위로 기차가 언짢은 듯 뿌앙 기적소리를 내며 지날 때에도 둥글게 커진 호박은 잘도 숨어 있었고 할머니는 긴 막대를 들고 양치는 소년처럼 비탈진 둔덕을 슬슬 걸어 다니며 호박을 찾아내곤 했다 때로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호박을 주울 때엔 무성한 호박 이파리에 묻혀 할머니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것이 가끔 슬펐고 자주 기뻤다 호박 몇 개는 늙어 가을을 탐했다
수줍은 할머니는 나를 알은체 하지 않았고 산책하는 콩에게만 가끔 인사했다 우쭈쭈쭈 놀러 나왔나 콩은 매번 모른척했고 나도 보이지 않게 목례를 하거나 입속말로 웅얼웅얼 인사하거나 내외하는 남녀처럼 콩을 사이에 두고 말을 건넸다 할머니에게선 산책 나온 강아지들에게 인사를 건넬 때에만 주름진 웃음이 보였다
할머니는 기찻길이 곧 없어진다 했던 그때에도 할머니였고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다
가끔은 시간이 멈춘 걸까 의심하였는데 기차가 진짜로 다니지 않기 시작한 이태 전쯤부터 인 것 같다 할머니의 시간이 급행열차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고
검은 머리 듬성했던 머리카락은 부스스스 부서지는 잿빛 먼지가 되고
주름이 딱딱해져 이제는 웃는 얼굴조차 겨울 복판에 선 나무 같다
곧 도로가 새로 날 것이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은 공원이 되거나 주차장이 될 것이어서 더는 경고성 푯말은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요즘처럼 찬바람 부는 계절에도 밭을 드나들고 있다
후년엔 반드시 사라질 밭에서는 마지막일 시금치와 대파가 얼었다 녹았다 할 것이고 덤불을 들락거리는 오목눈이와 딱새와 박새와 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와 그리고 길 건너 까치와 직박구리들은 앞으로도 분주할 것이나
이제 할머니의 발길은 어디를 헤매일까 겨울바람이 환하고 발그스름한 화살나무 낙엽을 쓸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