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꽃, 나
나로 사는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나다.
"내가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나로 사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렵나? 참으로 하찮다, 하찮아."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바로 그래서다,라는 생각에 닿았다.
자신을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비교적 쉽지 않겠는가. 그 '나'로 사는 일이 고될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라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받아들이는 일' 만큼은 그렇지 못한 나보다 수십수만 배는 쉽지 않을까. 스스로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지금의 내가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은 나로 사는 일이 어렵다. 저항을 부른다. 내가 나를 극렬히 저항한다. 그렇게 쪼그라든다.
그러나 그 저항마저 없다면 사람이 산다 할 수 있겠는가.
그냥 넙죽 나로 살겠다 받아들이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나'로 사는 일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의 욕망의 크기는 얼마만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느 것에서 더 만족감을 얻는지, 남이 들씌운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기타 등등 끊임없이 나를 탐구하고 사유해야 나로 사는 일이 가능하다.
다행히 나는 나이지 않은 적이 별로 없었다. 내 삶이 만족스러웠다는 뜻은 아니다. 그 나가 좋았다는 것도 아니다. 만족스러웠던 날은 없어 셀 수 없고 좋았던 날은 적어 셀 수 있을 정도다. 단지 어떤 역할에 떠맡겨 내가 아닌 채로 산 적은 없었다는 의미다. 딸, 아내, 며느리, 친구, 엄마로서 살면서도 나는 나를 그 어느 역할에 다 내어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나를 위한 시간이 없을 때에도 희생한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그래서 좋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다. 한 번도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은 사람이 자신에겐들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타인을 탓하지 않을 뿐, 나는 늘 고독하고 헛헛하다. 허무는 나의 기본값이고 나는 영원히 이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번쯤 다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소망한 적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서야 내가 조금 편해졌을 뿐 여전히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지금을 방해하는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자, 생각한다. 이 또한 나로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몸짓일 것이다. 그러나 또 너무 쪼그라들어 급기야 사라지지는 말자, 경계한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바이러스가 내 몸에 침투하면 싸우기 위해 출동하는 백혈구로 생각하자. 열심히 싸우다 보면 몸에 열이 나고 끙끙 앓게 된다. 너무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그럴 때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두려워 말자(솔직히 두렵다). 한 번 감기에 걸렸다 나았다고 다시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와의 싸움은 감기보다 더 자주 찾아올 수도 있다(이러면 절망스럽다). 그때마다 나을 방법을 찾고 건강을 도모하면 된다(말은 쉽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와 화해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 머무르는 날이 오지 않을까(죽기 전에 가능할까). 조금은 부족하고 여전히 내 맘에 쏙 들지는 않더라도 말이다(에게!).
10대의 나와 20대의 나와 30대의 나가 언제나 똑같은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 나빠진 적도 있고 40대 50대 60대를 지나며 이제 조금 마음에 드는 나를 만날 수도 있지만 70대 80대가 되어서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엔 지금 나는 더 나은 나, 더 좋은 나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 생각하며 멈추어 생각해야 한다. 흔한 말이지만 이것은 아무리 늦어도 그때가 가장 빠른 날이 될 것이다. 나는 어떤 나를 원하는가. 이것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질문이 아닐까. 나로 살기 위해 걷는 길은 끝없는 질문과 함께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나에게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모두모두 힘을 내어 각자의 '나'로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