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재구성 2
말하지 않아 상대방이 오해했다면 상대방 잘못일까? 내 잘못일까?
내 관점에서는 내 잘못이다. 명확하게 정보를 제공해서 상대가 미리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단한 시시비비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내가 연애를 못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28살 1월에 이혼을 하고 동네 친목 동호회에 가입을 했다. 동네 모임이라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는 정도였다.
몇 번 나갔더니 관심을 표현하는 분들이 있었다. 대시가 들어오기 전에 말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나는 이혼을 했고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좋아하게 된 상태에서 밝히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호감이 있는 듯한 이성에게는 내가 이혼녀이고 양육자임을 모두 선고백했다.
작년에 아이가 대학교 수시 합격을 한 후 다시 동호회 모임에 나가게 됐다. 자기소개 때 25학번 대학생 엄마라고 말했다. 나중에 몇몇 분들이 따로 물어보셨다. 남편의 유무에 대해.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내 소개의 처음은 늘 '엄마'라는 수식어로 시작되었다. 아이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암묵적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아이가 있으니 남편도 있을 거라 예상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를 아는 몇몇 지인들에게 핀잔을 들었다. 항상 '엄마'라고만 말하고 카톡 사진도 애 사진만 올리고 누가 봐도 유부녀 같으니 남자친구가 안 생기는 거라고. 거기다 철벽까지 치니 맨날 솔로인 거라고.
아이도 다 컸으니 달라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의 존재는 선언급하되 남편이 없음도 말하기로 했다. 잘은 모르지만 괜찮게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틈을 보이려고 했다. 나름 연애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는 동생, 언니들 조언을 되새기며 남자의 관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법을 공부했다.
10개월 동안 동호회에서 등산, 트레킹, 스키, 캠핑, 서핑, 먹벙에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면서 친해진 언니, 오빠, 동생들이 생겼다. 이제는 지인이 된 분들이 여러 명 생겼다.
여자에게는 연락처를 알려줘도 되고 남자에게 알려주면 쉬운 여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별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좋은 대인 관계로 연을 맺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다만 이성으로서 그분들이 따로 만남을 제의했을 때는 정확히 의사를 밝히고 거절했다.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한 회원분이 최근에 나를 카톡 '친구 차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그 여자분이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언니가 이혼했다고 말하고, 외롭다고 하니 남자들이 쉽게 보고 연락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그런 여자한테 연락을 안 해?"
그 말을 듣고 나의 언행을 스스로 되짚어보던 중에 반대편에 있던 남자분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여자가 외롭다고 해도 마음이 아예 없으면 남자도 연락 안 해."
추석 연휴 때 갑작스레 시골 가는 일정이 바뀌면서 연휴 전날 여유가 생겼다. 동호회 모임 일정이 있어 '참석'을 눌렀을 때 기 신청자는 충고를 했던 '그녀', 그리고 나와 친분이 있는 남자 회원 4명뿐이었다.
모임 전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참석'을 빼달란다. 참석 가능 인원이 8명에서 6명으로 줄어있고 신청자는 5명인데 한 명은 본인이 게스트를 데려와야 하니 나보고 빼달란다.
"네."라고 답하자 "감사합니다."라고 보낸 '그녀'가 나를 '친구 차단'했다. 게스트라고 온 분은 내가 예상했던 여자 회원분으로, 본인이 '참석'을 눌러도 되는데 게스트로 온 걸 보고 '그녀'가 수고스러웠으리라 짐작하게 되었다.
그 모임 전에 이미 신청한 등산 일정이 있었다. 집안일로 불가피한 취소를 하게 되어 댓글을 남겼지만 한나절이 지나도록 답이 없어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그 카톡은 일주일이 지나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친구 차단' 됐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존감이 엄청나게 높고 멘털이 강하다고 말했다. 본인은 살이 찌고 싶어서 일부러 찌운 거라고. 나는 너무 말랐다고. 언니도 살 좀 찌우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식가인 내가 살이 찌지 않기 위해 러닝과 헬스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다.
캠핑장에서 롱원피스를 입는다고 나무랐다. "누가 캠핑장에서 치마를 입어요?"라고 해서 "나는 옷이 대부분 치마이고 원피스가 제일 편해요."라고 말했지만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녀'에게 상처받은 건 맞지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나이에 비해 조금 어리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보다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할 수 없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도 낳지 않을 거라는 '그녀'. 관계의 주도권을 항상 본인이 쥐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녀'. 40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도 조금씩 성숙해 가면서 너그러워질 거라고 바라본다.
다음에 만나면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지난번 교통사고가 난 날, 저녁에 출발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차가 막히지 않았고,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그날 저녁에 와서 다음날 점심때쯤 떠나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나는 핑크빛 희망에 부풀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유일하게 단둘이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항상 원픽으로 꼽는 그를 내가 두 번 만났다. 본인과는 남매 같은 사이라고,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 '그녀'가 자주 말했다. 재밌고 멋있고 여유가 있는 그를 많은 여자들이 좋아했다. 나도 작년에 그를 처음 보고 설레었던 적이 있다.
8개월 동안 종종 연락만 하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그가 나에게로 왔다. 내가 사는 곳 근처로 오겠다는 제안에 러닝크루 나가는 날이라고 거절했다. 그는 "나도 달리기 잘해. 나랑 같이 달리자."라고 했다. 이 말이 우습기도 하고 유일하게 이성적인 관심이 있었던 분이기에 그와 단둘이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와 사귀기로 했다.
'그녀'와 그가 알게 된 지는 5년 정도 되었고 그는 가볍지 않고 모든 관계에서 깔끔하며 동호회에서 어떤 여자도 사귄 적이 없다는 말을 그와 '그녀'에게서 들었다. 그런 그가 사귀자고 했고 그 순간은 진심이라고 믿었다.
교통사고를 낸 직후 그에게 전화를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그가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멀찍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먼저 올라갔고 저녁에 건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튿날 집에 도착한 후 "ㅇㅇ가 데려다줘서 집에 잘 도착했어요. ㅇㅇ한테 맛있는 거 사주세요."라는 카톡에 "알았어. 고생들 했네."라는 답이 전부였다.
사고 이후 4일, 8 일만에 "사고 처리는 잘 됐어?", "사고 처리는 잘 된 건가?"라는 톡이 왔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사람의 말은 참고사항이지 믿을만한 무게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건 암묵적 대화, 행동이다.
그의 행동을 보며 그가 왜 동호회에서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를 믿고 좋아했던 나는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했고 차단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