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과 친구 사이
먼치에서 가로등 불빛만 드리워진 어둑한 산책길에 그림자가 앞서 걸었다. 걸음마다 앞서 있던 그림자가 기우뚱 흔들리다 자리를 잡았다. 긴 머리카락에 길게 퍼지는 원피스, 단발머리에 두둑하게 감싼 점퍼, 묶음 머리에 육덕진 레깅스까지 고만고만한 길이의 그림자가 셋이다.
기웃거리는 미색 눈동자, 나뭇잎 같은 파르스름한 입술을 어둠이 허옇게 덮고 있었다. 도톰한 이불을 들춰 비밀 얘기를 꺼내듯 두텁게 내린 어둠 속에서 진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새까만 보호막을 두르고 동지로 묶인 듯 착각에 빠져있었다.
"우리 얘기 다 듣고 언니는 말 안 하면 진짜 양아치야." 혀 안에서 돌고 도는 말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숨을 고르는 내게 쐐기를 붙이듯 그녀 중 한 명이 말했다. '양아치'라는 단어가 나를 살짝 자극했고, 나 역시 비밀을 털어놔야 한다는 '내적 결벽증'에 밀려 말문이 트였다.
그녀가 첫 번째로 좋아한다는, 본인과는 이제 남매 같다는, 소개해 줄 만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 그녀가 수 차례 자랑했던 그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취조를 하는 듯 정말 사귀는 게 맞냐고 계속 되물었고 나는 점점 상세하게 답하고 있었다. 나의 치부가 밝혀진 듯 뉘앙스가 고조되고 조금 더 짙어진 적막 안에서 그녀의 성난 눈동자, 달아오른 볼, 거친 억양을 본 것 같다.
시누이가 된 느낌이었던 걸까? 그를 남자로 좋아하는 걸까? 내가 그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본인이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과 내가 사귀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차 안에서 불편한 새벽을 버티고 밤이 잠들 때를 기다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시동을 걸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내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 언니가 나서서 말했다고, 다른 팀 동료한테서 들었다.
"언니가 내 편 들어줬다면서요? 근데 뭐라고 내 욕 한 거예요?"
"나도 잘 몰라. 근데 듣다 보니 기분 나쁘고 넌 그런 애가 아니니, 설령 네가 잘못했다고 해도 지들은 뭐가 잘나서? 뒷담화하는 것들이 잘못이지. 난 무조건 네 편이야."
안 지 10년은 넘었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의리도 있고 재미도 있는 한 살 터울 언니가 한 말이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진실한 마음으로 소통하는 관계가 친구가 아닐 수 있을까? 위기 상황에서 나의 편이 되어주고 나에 대해 개인적이고 깊은 면까지 이해하는 관계가 친구가 아닐 수 있을까?
언니는 회사 동료이지만 내 친구이고 나도 언니의 친구이다.
친절함과 챙김과 배려를 친구의 징표로 받아들여도 될까? 개인사를 공유하고 공감을 하고 나에게 조언을 해 줬다면 친구로 간주해도 될까?
같이 어울린 지 10개월쯤 된, 숙박을 10번 이상 같이 한 그녀를 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부모님 얘기, 회사 얘기, 본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대시를 받았고 얼마나 괜찮은 남자와 많은 교제를 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카톡 차단'을 하고 '강퇴'를 시켰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연애 노하우를 가르쳐주고 나의 이상형을 물어보며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자정의 비밀 대화 이후 그녀와 나는 두 번을 더 만났다. 그 사이 그녀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그와 내가 맞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통해 이 소식을 알게 된 그녀는 나를 '카톡 차단'시켰다.
요즘 왜 모임에 잘 나오지 않냐는 물음에 세세히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혹여 '카톡 차단'시킨 다른 이를 말했듯 내 얘기를 해도 해명하지 않겠다. 나를 아는 이는 나를 믿을 것이고 나를 모르는 이는 타인이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다.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카톡 차단'한 후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친하게 여기는 언니와 몇 달 전부터 약속한 일정이라 지키고 싶었다. 내가 먼저 '참석'을 눌렀으니 그녀가 정 싫으면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뒤이어 '참석'을 눌렀고 별일 없던 듯 내게 다가와 근황을 물었다. 서로 담백하게 대꾸하며 가까워지지 않을 거리를 지켰다.
나는 가끔 친하다고 생각하는 지인을 친구라고 오해한다. 지인은 나의 편이 아닐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걸림돌이나 복병이 될 수 있는데 못 알아봤다. 친한 척하는 것과 친한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녀가 난데없이 어떤 이를 추켜세우거나 느닷없이 나를 낮추어 말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동호회 여왕벌'이라고 칭했을 때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다.
나만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미욱함으로 스스로 상처받았다. 너를 좋아하고 믿어서 내 부끄러움과 모자람까지 드러냈더니 너에게 나는 부끄럽고 모자란 사람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그녀의 친구였고 다만 그녀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