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솔로. 어떤 이는 못 믿는다고 했고 누군가는 내가 바보라고, 이해할 수 없다고 웃어넘겼지. 나는 그리 세월이 흘러 아이가 9살이 넘도록 연애할 엄두를 못 냈어.
왜냐면 내 피붙이에게 받는 사랑이 너무 컸고 당장 엄마인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어. 아이에게 늘 했던 말처럼 부족한 게 있으면 더 받는 것도 있다고 너는 세상 누구보다도 엄마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라고, 난 이 말을 증명해 보이려 했어.
만 4개월이 된 아이를 홀로 품에 안으며 다짐했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어.
나는 억척 엄마였을까?
인근에서 제일 좋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냈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예체능을 모두 배우게 했고 책을 싫어하는 아이를 위해 숱하게 손 편지를 썼고, 매일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놀아주는 엄마였어.
사립초등학교에 아이를 입학시켜 퇴근 후에 빼놓지 않고 한 시간 이상 아이 옆에 붙어, 숙제를 도와주고 공부를 가르쳐주고 함께 공부하는 지독한 엄마였지.
그렇게 나는 그냥 엄마였어.
6년 동안 나를 위해 나는 무엇을 했나?
홈쇼핑이나 로드샵에서 값싼 화장품을 사고 10년도 넘은 옷과 구두를 껴입고, 핸드크림 한 번 제대로 바르지 않은 맨손으로 손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그렇게 서른다섯이 되었어.
그러다 2014년 8월의 마지막 즈음, 나도 여자라는 걸 차츰 기억하게 됐나봐.
누군가 잡아주는 내 손이 거칠까 봐 창피하고 10년도 넘은 옷과 신발이 촌스럽게 느껴지고 그동안 잘 보지도 않았던 거울 속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이 속상했어.
늘 구경만 하거나 아이 것만 샀던 백화점에서 내 옷과 신발을 구매하고 얼굴에 팩을 하고 손톱 관리도 받고 그렇게 나는 다시 여자가 되려고 했어.
첫인상에서 별 다른 호감은 없었어. 다만 여러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은 미리 하고 있었지. 그래서 만나기 전에 준비했던 거야. 코팅한 단풍잎과 클로버, 그리고 '어린 왕자'.
당신을 대하는 내 첫 마음을 스스로에게 그렇게 각인시켰던 거야.
나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닮았던 사람.
계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사소하게 장난치며 웃을 수 있고 비슷한 아픔과 흉터와 두려움을 가진 사람.
같이 있으면 덜 힘들 거라는 걸 알았어. 최소한 지금보다 행복할 자신도 있었고, 그리고 '보란 듯이'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어.
마음이 원하는 대로만 했다면,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로 내뱉지 않았다면.....
당신이 처음으로 '그만하자'라고 말했을 때부터 내 머릿속 작은 한 편에서 의구심이 들었어. 이 사람 믿어도 되나? 약속도 안 지키는 그저 그런 흔한 사람 아니야?
당신의 또 다른 고백을 듣고 머리로 더 많이 생각했고 내가 손해 본다는 계산도 했고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나는 6년 만에 여자가 되었고 내 편이 간절했고 당신이 그래도 내 편에 가장 가까웠으니까.
내가 정말 그만 둘 결심을 한 건 내 생일 전날이었어. 당신의 이기심과 무관심에 초라해진 내가 불쌍했어. 결국 아버지와 오빠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 취소를 알렸고 나는 당신과의 이별을 위해 그날 그곳에 갔어. 그리고 그런 행동을 했고 당신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고 그대로 돌아섰어야 했는데 미련스럽게 아직 당신이 좋았어.
머리로 연습한 대로 행동하고 말했는데, 그래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리고 알았지. 내가 당신에게 길들여졌다는 걸.
당신이 나를 붙잡아줘서 고마웠고 하지만 우리는 삼일도 되지 않아 두 번을 더 그만두자 했고 당신은 나를 그렇게 세 번을 붙들고 놓아줬어.
누가 봐도 사랑받는 여자처럼 보이게 해달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매달려 당신을 지치고 싫증 나게 하는 여자였지. 그래서 당신이 나를 더 많이 사랑할 수 없었던 거야. 매일 당신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나만의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했어. 왜 당신이 나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어.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만들었던 거야. 당당하고 자신 있고 절대로 시시하지 않은, 그런 나를 내가 스스로 버리고 있었어.
우리가 함께 사랑한 시간은 한 달 남짓, 나머지 한 달은 싸우고 오해하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그만둔 시간, 그리고 지나간 또 한 달은 서로가 떨어져 스스로를 냉정히 바라다본 시간.
이렇게 3개월이 흐르며 우리는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한복판, 그리고 겨울의 초입까지 흘려보냈네.
결혼이 종착역도 인생의 목표도 아닌데 우리는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던 걸까?
나는 애초에 최소 1년 이상 교제를 해 보고 결혼을 고려하려고 했었는데 당신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무작정 당신과 같이 있고 싶고 점점 다른 건 중요치 않아 졌어.
서로를 잘 알지 못해 불안한 부분도 당신 말대로, "팔자로 생각하고 살자."라고 마음먹으니 걱정이 사라졌어.
함께 살다 보면 불편함은 있겠지만 불안함과 외로움은 없을 거라고 그리 믿으니 당신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졌어.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결혼을 준비했던 우리.
철없는 이십 대 초반도 아닌데 많이 용감했나 봐. 아니면 몹시, 정말 절실했나 봐.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단점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당신에게 정이 들었고 당신에게 책임감을 느꼈고 그래서 더 노력하고 싶어졌어.
홀로 마주한 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서른다섯이라는 숫자에 어울리게 나이 든 나를 발견했어. 내 바람대로 나의 재산은 늘었고 나는 여전히 꿈꾸고 있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좋아.
지금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말은,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변하기 싫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당신이 변하기 싫은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 두렵지 않아. 한 사람만 꾸준히 변해도 거울처럼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당신과 멋지게 사랑하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서로'였으면 좋겠어.
다만 유일한 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