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면
언어. 말. 글.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걸 언젠가부터 보아왔습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한 해에 두세 번 정도 지독히 앓아누웠죠. 마음이 아팠던 거죠. 참기 힘든 회의가 들어서.
왜 난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순간의 격정적인 감정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례적인 인사말 정도로 내던져지는 지키지 못하는 약속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마다 아팠죠.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의 언어. 난 그것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두었는데. 그리고 믿었는데.
내가 바보였던 걸까요? 정말 진실한 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하는데. 내가 믿어서는 안 되는 걸 믿었던 걸까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날이 있었죠.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는 믿지 말라고.
더 이상 눈물 흘릴 기력도 고통스러워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은 날.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주는 사람들. 날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 그렇게 부정하려 했는데 어느 순간 난 다시 사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슴에 조그만 두려움의 자리가 생겼죠. 그래서 가끔은 또 내가 언어에, 사람에 속아 배신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유난한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나를 너무나 슬프게 했던 것들. 비장한 각오로 날 기쁘게 했던 그러나 결국 깨어진 다짐들. 영원을 약속하는 다만 한 순간 진실했던 마음들. 그리고 그런 약속들에 대해 "그게 뭐가 중요한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
많이 아팠던 그때 이후로도 의지와 진실과 사랑의 약속들을 들어왔습니다. 그때마다 난 이렇게 말했죠.
"지키지 못할 약속하지 마. 지금의 너에겐 너의 언어가 모두 진실이겠지만 언젠가의 너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 그저 그런 말이 될지도 몰라. 네가 약속을 하기 위해선 네가 꺼낸 언어에 스스로 얽혀 살아갈 의지,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야. 넌 변하겠지만 너의 언어는 변하지 않도록 이성으로라도 붙잡아 둘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이유 때문에라도 변할 수 있는 약속이라면 처음부터 꺼내지 마."
난 변하는 모든 걸 싫어했죠.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을 것들. 나 자신. 자연. 문학. 예술. 그리고, 그리고...
지금의 난, 믿을 수 있는 것. 내 모든 걸 줘서 믿어도 되는 것. 나만큼이나 잘 알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요. 찾고 있어요. 그게 나한테는 희망이니까요. 내가 희망할 수 있는 건 세상에 희망이 존재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숱한 세월에도 변하지 않을 '나'라는 사람이.
내가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꿈꾸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희망을 본 적이 없는데, 나 자체가 희망의 모습이 아닌데 어떻게 먼 어딘가에 희망이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보이지 않으면 외롭겠죠.
지금 난 단 하나의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은 언젠가 아름다운 이에게서 또 다른 희망을 보게 되길 간절함과 설렘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