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인치 여행 가방에 담는 인생

by 클레어

드르륵 덜컹 덜덜덜 Suitcase

바퀴는 때로 요란하게, 때로 경쾌하게, 또 때로는 조용히 굴러가며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게 길 위를 활보하는 여행 가방은 흔히 ‘트렁크(trunk)’라고 불린다. 영어로는 luggage, baggage, carrier, trunk 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지만, 여행 가방 한 개를 가리키는 말은 Suitcase이다.


여행길에서 가방은 설렘의 상징이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곤혹을 안겨주기도 한다. 미국 동부에 폭설이 내려 항공편 연결이 끊겨서 정작 짐은 이틀 후에야 도착한 적도 있었다. 잘 굴러가던 트렁크의 바퀴 하나가 아시아 길거리 어딘가에 남겨진 채 사라져 버리기도 했고, 멀쩡하던 손잡이가 부러지거나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끝내 열리지 않아 난감했던 순간도 있었다. 가방을 분실했을 때는 항공사 카운터에서 크기와 색상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나의 것’ 임을 증명해야 하는 초조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여행가방을 몇 차례 바꾸는 동안, 그 작은 상자 하나로도 참 많은 사건이 있었다. 돌발 상황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그 경험은 인생이란 언제든 예기치 못한 변수와 마주해야 하는 여정임을 조용히 가르쳐 주었다.


20인치라는 한계, 그러나 충분함

기내용 가방은 항공기라는 ‘제한된’ 공간에 적합한 크기와 그 한정된 공간에 채울 물품을 고민하게 한다. 많이 담을 수 없기에 선택의 기로에 선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타지에서의 짧은 여행은 ‘미니멀’ 라이프를 실현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인생 역시 유한한 시간과 제한적 조건 속에서 선택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필요와 더 필요를 생각하고, 들고 올리고 나를 수 있는 역량을 고려하며 무엇을 담고 무엇을 두고 갈까?라고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이어다.


소유에서 비움으로 나잇대별 짐 싸기

해외여행이 일상화되면서 짐 싸기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흔히 보게 된다. 여행 필수품으로 시차 적응을 위한 수면 음료, 소형 다리미와 전기장판, 전 세계 어댑터, 일회용 베갯잇 등 참 다양하다.


20대 청년 시절은 ‘소유’의 시대였다. 가방은 설렘과 증명의 도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과 가능성은 화장품, 옷, 선글라스 이것저것을 보부상처럼 챙겼다. 게다가 멋스러운 표지와 매력 있는 제목이 박힌 책 한 권도 슬쩍 집어넣는다. 더 많이, 더 멀리, 더 높이 가고픈 마음이 가방 한가득이다.


30-40대에 이르러서는 일에 대한 ‘책임’이 극명하게 나타났다. 부치는 짐에도 손에 든 작은 가방에도 서류 뭉치다. 바쁜 업무로 다 읽지 못한 회의 자료들을 기내에서 읽고 또 읽으며 갔다.


그리고 50대 중년이 되니 짐의 30%는 의약품인 듯하다. 상비약, 편안한 옷과 신발을 챙긴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타인을 고려하며 짐을 꾸린다는 사실이다. 혹 가족이나 동행인이 배탈이 나거나 감기몸살로 아프거나 근육통이나 타박상이 생겼을 때 부착할 약품들을 한 보따리 챙긴다. 만물상이 따로 없다. 그러나 가방은 ‘돌봄'이며 관계를 담는 공간이 된다.


어느덧 노년의 시간을 서서히 준비하듯 가방을 챙기는 나의 모습이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움’의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다. 익숙한 물건을 챙기지만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을,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을,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것을 선택한다. 부족함과 단순함이 주는 평온함을 즐긴다.

여행 가방은 짐이 아니라 선물

20인치 가방은 한계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충분함이다. 그동안 내가 담아 온 것들을 짚어보니 여행 가방은 무게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었다. 출장 길에 지치고 힘겨울 때면 트렁크가 짐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분명 선물이었다. 인생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감사로 담아왔는가의 이야기이다. 언제 또 여행을 떠날지는 모르지만 모든 날 모든 순간을 감사로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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