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지우개란

흰 지우개와 지우개 가루

by 파도

연필을 쓰는 사람에게 지우개는 선택이 아니라 기본 세트입니다.
연필만 덜렁 들고 앉으면 어딘가 불안하고,

지우개까지 책상 위에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책상 위에 쌓인 가루를 보면, ‘아, 내가 뭔가를 꽤 많이 고쳤구나’ 싶어집니다.

잘못 그렸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렸다는 흔적이기도 해서요.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의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도 없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저는 지우개를 꽤 자주 쓰는 편입니다.
선을 한 번에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지우고, 다시 긋고, 또 지웁니다.
예전에는 이게 좀 부끄러웠습니다.
한 번에 딱 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괜히 실력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지우개를 많이 쓴다는 건, 그만큼 계속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대충 넘기지 않고, 마음에 들 때까지 손을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라면
이건 나쁜 습관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흰 지우개는 그래서 저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 선이 마음에 안 들면 지워도 되고,
다시 시작해도 된다고, 아주 조용히 허락해 주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지우개 가루는 그 허락의 결과물 같습니다.
잘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적어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흔적 정도는 됩니다.

오늘도 책상 한켠에 흰 지우개가 있고,
그 옆에 작은 가루들이 조금 쌓여 있습니다.
아마 내일도 비슷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풍경이 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이 지우개 가루들이 그냥 버려지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서인지 제 캐릭터 ‘문’은

지우개 가루로 작은 아트를 합니다.

잘 그리려다 남은 흔적, 지우고 다시 하다가 쌓인 결과물들이

어느 순간 경험이 되고, 또 다른 창작물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저는 믿는 편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중간에 많이 지워도 괜찮고,
남은 가루가 많아도 괜찮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은
다음에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니까요.

오늘도 지우개 하나와 연필 하나,
그리고 책상 위의 작은 흔적들로
저는 계속해서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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