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생각을 꺼내서 만든 지표
(물론 종이는 아무 생각 없죠.)
예전엔 첫 선을 긋기도 전에 이미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요즘은 그냥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새 종이를 볼 때 너무 진지할 때가 더 많나 싶기도 해요. (종이가 무슨 시험지라도 되는 것처럼.)
근데 알고 보면 첫 선은 그냥 “시동 걸기” 정도의 의미예요.
틀리면 지우면 되고, 다시 그리면 되고. 이걸 받아들이면 종이랑 사이가 훨씬 좋아져요.
흑연 발바닥은 정확히 앞문단 눈밭의 흙 묻은 신발을 생각하고 만들었거든요.
그림이나 기록으로 가득 찬 종이를 보고 있으면
왠지 성실하게 보낸 하루 같더라고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를 볼 때 보다 훨씬 기분이 낫죠.
저는 요즘 새 종이를 '완성작 그리는 종이’보다 '지나가는 찰나의 생각을 담아내는 종이'’ 정도로 생각해요.
마치 찍는 속도가 빠른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것처럼요.
그러면 새 종이가 더 이상 긴장되지 않고 그렸을 때의 즐거움이 기대가 되죠.
그래서, 새 종이를 대하는 저의 태도는 아주 간단해졌습니다.
어떤 완벽한 것으로 종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릿속을 그리는 지도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처음 선을 그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잘해도 좋고, 망쳐도 좋고,
심지어 종이를 다시 쓰면 더 좋습니다.
그렇게 채워나간 종이는 분명 '나'를 아주 잘 담고 있을 거예요.
필이 종이를 채우고 틀리면 문이 지워주는, 환상의 콤비가 있다면
새하얀 종이도 두렵지 않죠.
여러분은 새 종이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시나요?
약간 설레나요, 아니면 긴장되나요?
혹시 첫 획을 못 그어서 며칠째 일기나 다이어리나 노트가 쌓여있지는 않은가요?
그 종이들은 자기들을 써주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하고 혼자 상상하곤 합니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아끼면 똥 된다." 하하
굉장히 어감이 센 말이지만, 나이가 들 수록 공감하는 말이에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여러분의 하루에도
“새 종이 한 장 펼쳐볼까?” 싶은 여유가 깃들길 바랍니다.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