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은 왜 ‘펜’이죠?
왠지 첫 획은 이야기의 첫 시작 같고,
그 시작은 멋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더 과거였다면 붓이었을까요?)
제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도 연필은 늘 있었죠.
어떤 날은 펜이 더 편하고, 요즘은 펜으로
바로 시작하는 경우도 많지만
마음이 복잡하거나, 방향이 안 잡힐 때는
역시나 연필을 찾게 됩니다.
저는 연필의 지워질 수 있다는 특징이,
틀림을 인정하는 사람의 자세처럼 느껴져요.
틀려도 괜찮고, 망설여도 괜찮고.
다시 해도 괜찮은 그런 단단한 사람이요.
문구덕후식으로 말하자면,
연필은 “일단 해보는 용” 문구입니다.
“필이면 펜이나 붓 아닐까?” 싶으시죠?
제가 만든 ‘필’은 ‘펜’이 가지는 의미보다
‘연필’의 의미를 가진 캐릭터입니다.
펜의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아닌
연필이 남긴 ‘지워질 수 있는 자국’인 거죠.
필은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는 캐릭터예요.
변덕스럽다 싶을 정도로
생각이, 마음이 달라지면 다시 쓰고 그립니다.
그래서 필은 연필을 기반으로 만들었어요.
필은 모험심도 많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에요.
진하기도 조절을 할 수 있고,
지울 수도 있고 여러 겹 겹칠 수 있는 연필과 같죠.
가끔은 처음 스케치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 시작하기도 합니다.
이게 필의 성격이기도 하고,
제 작업 방식이기도 해요.
연필은 준비 단계고, 과정을 충분히 거친 뒤에
펜으로 넘어가기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연필로 충분히 그려봤기 때문에
나중에 펜을 들 수 있는 거죠.
저에게 연필은
망설여도 괜찮다는 허락이고,
지워도 된다는 안도감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필이 연필인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생각을 쓰게 하는 존재,
헤매도 된다고 알려주는 캐릭터.
연필을 아직 아껴만 쓰고 계신 분이 있다면
오늘은 한 번 써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각이 술술 써질 지도 모르니까요.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