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시선의 확장

벗어나야 비로소 보인다.

by 물 긷는 자 연지신
Next Person.

입국 심사관이 나를 불러 무덤덤한 표정으로 몇 마디 묻고, 여권에 스탬프를 찍었다. Feb 21, 2002 - 파란색 타원 안에 빨간색 글씨. 2002년 2월 21일까지 6개월간 미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는 증명서.


짐을 찾고, 안내판을 따라 터널 같은 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니,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다 왔다’는 안도감에 “휴…” 하고 한숨이 새나왔다.

두리번거리니 저쪽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였다. 엄 사장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이사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지요?” 맞이한다. 오 부장도 함께 왔다.

주차장으로 가니 큼직한 흰색 아우디가 기다렸다. 사장이 직접 운전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한국에선 기업 오너 정도는 돼야 탈 수 있는 찬데, 젊은 사장이 직접 운전해서 마중 나오다니…’


사장은 나보다 세 살 적었다. 165cm 정도 약간 작은 키에, 다부진 체형이었다. 홀 어머니를 모시는 유부남으로, 아직 아이는 없다. 그는 차 안에서 수시로 영어로 통화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로 대강 어림 짐작했다.

문득, ‘소리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글을 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청각 장애자, 까막눈에 다름 아니네. 여기 온 게 잘한 건가...’ 의심이 든다.

불쑥 불쑥 올라오는 의심은 안전에 대한 염원이고, 가장이란 위치에서 오는 무게였다. 항상 두려움이 따라왔다.


그는 통화가 끝나자,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 후계자와 대학 동창이라며, “그 친구, 처음 미국에서 차 살 때, 제가 보증도 서주고, 저한테 신세 좀 졌어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분히 나를 의식한 듯 은근히 과시했다.

부장은 한국에서 온 지 몇 달 안 된, 30대 중반의 여자 디자이너였다. 그녀는 차 안에서 “가족들은 언제 오세요? 오시면 먼저, 이걸 꼭 하셔야 해요.” 미국에 처음 와서, 몸으로 부딪치며 익힌 노하우들을 알려주려고 애썼다. 중간중간 간간히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릴 때엔 목소리 톤도 함께 올라갔다. 가끔 “오 마이 갓! 웁스”하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게 들렸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길 옆으로 야자수가 쭉 이어졌다. 옆 차선에서 덩치 큰 흑인이 흰색 민소매 옷을 입은 채, 창을 열고 운전한다. 큰 음악 소리로 차도 몸도 들썩 거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좀 지나니, 도로 옆 주택가에 유전이 나타났다. 도심 한가운데서 시커먼 쇳덩이 여럿이 함께 모여,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름을 퍼올리는 장면은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미지의 세계는 떨어져 있으면 동경의 대상이지만, 현실로 다가올 때, 두려움이 되었다.


회사는 LA 한인 타운 중심 윌셔가에 있는 빌딩 3층에 있었다. 스무 평 남짓한 아담한 사무실로, 입구에는 안내 데스크와 손님용 작은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장식용 큰 인형이 눈길을 끌었다. 안내 데스크 뒷 벽에는 회사 이름과 로고가 세련되게 걸려 있었다. 직원은 사장과 나를 포함해서 모두 7명으로 광고를 제대로 해본 사람은 나와 오 부장 외에는 없었다. 사장도 광고 경험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잠시 후, 광고주 현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다고 말하자, “Welcome입니다” 반갑게 맞는다. 여기저기서 환대받고 있지만, 이것은 나에 대한 기대였다.

기대는 채워지지 않으면, 한순간 실망이 되고, 좀 더 지나면 적대감으로 변한다.

나는 미국에 대해, 엄 사장에 대해, 현 과장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나와 초대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아직 잘 몰랐다. 이 기대의 간극이 내심 불안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 떨어져 보니, 그동안 내가 세상에 대해, 심지어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한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바로 알게 되었다. 내가 마주한 사람들은 생전 처음 접하는 이방인이었고, 그들 눈에도 나는 낯선 손님이었다. 알아 가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너무 촉박했다.


회사에서 한인타운에 있는 하숙집을 임시 거처로 마련해 주었다. 하숙집에서는 아침과 저녁이 제공됐고,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지만, 주인은 항상 부엌에 따로 챙겨 놓았다.


내 방 침대는 프레임도 없이, 덜렁 1인용 매트리스 두 개가 합쳐져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미니 냉장고는 음료수 몇 병만 겨우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작은 창문 아래 20인치가 안 돼 보이는 오래된 TV가 있었다. 벽에는 작은 클로젯이 있어서, 옷과 자잘한 짐들을 둘 수 있었다. 화장실과 세탁실은 공동으로 사용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만 가능한 장기 투숙객을 위한 여인숙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창 밖에 내려다 보이는 옆집에선 거의 매 주말, 파티가 벌어졌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온종일 계속됐다. 아코디언과 기타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남미 계통 음악으로, 비슷한 리듬이 계속 반복되어 중독성이 있었다. 아이들은 마당의 수영장을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소리치며 놀았다. 파티는 대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자꾸 들으니, 익숙해졌고, 애잔함이 전해지는 게 그들의 아리랑 같았다.


주인은 70대 정도 돼 보였는데, 노란색으로 ‘Korean War Veteran’ 글씨가 선명하게 찍힌 까만 모자를 항상 쓰고 다녔다. 그 모자가 제복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게 이것저것 주의 사항을 친절히 알려 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덧붙였다. 부인은 하숙생 식사 준비로 바쁜지, 손에 바리바리 장 바구니를 들고 집에 들어오는 모습만 간간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은퇴 후, 2층짜리 단독 주택을 개조해서 하숙을 치며 생활했다. 하숙생은 총 10명 정도로 아래층엔 여자가, 남자는 2층에 있었다. 하숙비만 제대로 받아도, 주인 내외가 생활하는 데는 문제없어 보였다. 부엌 옆 거실에는 하숙생을 위한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주로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한 배려였는데, 어떤 이에게는 이 전화가 외부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9시가 되어 어두워지면, 모든 것이 정지된 듯 조용했다. 한국에서 이 시간이면, 이제 시작인데, 여기는 모든 것이 마감되는 시간이었다. 한동안 오후 9시를 새벽 3시로 착각할 정도였다. 창 밖을 보면 야자수들이 검은색 실루엣으로 길게 이어져, 내가 미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했다.


하숙집에서 식사는 주로 혼자 했다. 굳이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과 밥까지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편했다. 저녁 식사 후엔 '영어 공부라도 해야지'하며, 주로 TV를 보고 있었다.

“똑똑똑”

'누굴까? 이 시간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누구세요?” 물었다.

“아, 예. 옆 방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오고 가다 마주치면, 눈인사만 나누던 옆 방 사람이었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별다른 직업은 없어 보였다. 며칠 전 그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얼핏 들으니, 일하고 돈을 못 받고 있는 듯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힘이 잔뜩 들어간 낮은 소리로 간곡히 말했다.

"일을 시키셨으면 다만 얼마라도 주셔야죠..."


그의 손에는 소주 한 병과 간단한 안주 거리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혹시, 술 좀 하세요?

“아, 예… 들어오세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마침 나도 누군가와 부담 없이 대화하고 싶었던 차였다. 소주 한 병을 금세 다 비우고, 한 병 더 하자고 한다. 반가웠다. 그는 주로 혼자 이야기했다.

“15년 전, 도망치듯 미국에 왔어요. 막일을 했는데, 그동안 한 번도 한국에 가지 못했네요. 가족과는 연락도 끊겼고,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2년 전입니다. 올 때부터 불체라 한국에 갈 수도 없어요. 점점 나이도 들고… 막막합니다.”


술은 입으로 들어가는데, 취기는 가셨다. 지금까지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내가 잠자는 방도, 밖의 풍경도, 사람도, 분위기도 모두 바뀌었는데, 아직 나만 그대로였다.


업무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단순했다. 현 과장과 몇몇 작은 광고주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진행시키면 됐다. 그동안 엄 사장이 하던 광고주 상대 일은 거의 내가 맡아서 했다, 야근도, 회식도 거의 없었다. 내가 온 후로, 사장은 근무 시간에 자리를 자주 비웠다. 어떤 날은 오후에 나가, 연락도 없이 하루 종일 안보였다.

‘작은 회사가 이래도 되나…’ 불안하기도 했고,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첫 월급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보, 미국에서 전쟁이 났대요.
지금 큰 일 났어요.

미국에 온 지 20일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아침 8시 30분, 막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한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전쟁이라니…’ 가던 걸음을 멈추고 TV를 켰다.

TV 화면에는 멀리서 선회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뉴욕 국제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았다. 곧이어, 빌딩 중간이 시커먼 연기로 뒤 덮이더니, 차례로 무너지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TV를 바라봤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회사로 가는 길,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아 머리가 엉켰다.

‘경기에 극도로 민감한 광고 업계, 영세하기 그지없는 작은 회사.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장에게 그런 역량도 안 보이는데’


잠시 후, 회사에 도착했다. 직원들은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깊어 보였다. 그들은 정착민이었고, 나는 이방인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의 말이 진실이길 바랐다.

막연한 믿음과 기대는 무지에 다름없었다. 곧바로 미국이 멈춰 섰다. 예정된 모든 광고도 무기한 중단됐다.


이후, TV, 라디오, 신문 등 언론에서는 하루 종일 이 사건에만 집중했다. 24시간 내내 구조하는 소방관,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관, 다소 무능하게 비췄던 부시 대통령을 강력한 지도자로 재조명했다. 미국은 이때다 하며 다시 영웅담을 썼고, 언론은 갑자기 늘어난 뉴스거리로 흥분했다. 비극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스토리를 만들어 갔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면 저들 각본대로 할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이익금은 완성된 각본의 흥행에 따라 힘의 논리로 분배되었다.


회사는 이런 긴박함과는 반대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사장은 별 초조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사님, 제가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어요. 내 생각대로 되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증시에 상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떠벌리며 호언장담했다.

‘세상이 그렇게 쉽지 않을 텐데…’ 믿어지지 않았다. 사장은 어디를 다니는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더 잦아졌다. 오 부장도 아프다며, 자주 결근했다. 의심은 점점 불안함으로 증폭됐다.


하숙집 사람들 대부분은 일용직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근근이 살아가는데, 갑자기 일이 끊겼다. 며칠 지나니,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웨스턴가와 7가 맥도널드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삼삼오오 모여 온종일 장기를 두었다. 가끔 “장이야”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장이야’는 ‘빨리 먹고살게 일자리를 달라’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들 대부분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사연을 갖고 있었다.

‘일 없다는 것이 이토록 불안하고, 무기력 하다니’ 난생처음 겪고 있었다.


토요일 오전, TV를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옆방 사람이었다. 하숙집에서 유일하게 대화하는 사이로 이젠, 꽤 친숙해졌다.

“네, 들어오세요” 그가 들어와서 쭈뼛쭈뼛하며

“혹시, 오후에 차 좀 태워주실 수 있나 해서요. 신문에 목수를 찾는다는 광고가 났는데, 기름값은 드리겠습니다.” 15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산 쪽으로 빠지는 곳에 기도원을 짓는데, 사람을 구한다. 당분간 거기서 숙식을 하며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두 시간 정도 가는 꽤 먼 거리로, 택시로 가기에는 큰 금액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답답한 마음을 잠시 털어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1시쯤 길을 떠났다, 10번 고속도로는 벌써 제법 길이 막힌다. 동쪽으로 약 50마일 정도 가니, 15번 고속도로가 나왔다. 15번 고속도로는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 항상 차가 많았다.

높은 언덕을 넘으니 왼쪽으로 빠지는 작은 도로가 나왔다. 거기서 약 2-3 마일 정도 더 가니, 비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길 옆에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시냇물이 흘렀다. 약 10여 분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니 기도원이 나타났다. 계곡 군데군데 방갈로 같은 작은 목조 건물이 있었다. 산 속이라 한인타운과는 달리 꽤 쌀쌀했다.


가운데 위치한 제법 큰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서너 명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쳐다보더니, 한눈에 일하러 온 사람이란 것을 알아보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 혼자 사는 50대 중반에서 6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미국에 온 지 20년이 넘었고, 10년 기까이 가족들과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다고 했다. 이젠 별 필요도 못 느끼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해 안됐지만, 그들 사이에는 서로 동병상련을 느꼈다. 간간히 함께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 '이젠 돌아가야겠어요'라고 인사하고 나왔다.

옆 방 사람은 “가는 것은 제가 알아서 갈 테니 염려 마세요. 참 고마웠어요.” 하며 기름 값으로, 주머니에서 20달러를 건넸다.

“나중에 돈 받으면 그때 주세요” 사양하고 길을 나섰다.


오는 차 안에서, 가족들과 연락이 끊긴 채 홀로 살아가는 저들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들은 왜 살까?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곧 생각을 멈췄다.


그들의 대화, 웃음소리,

장기판에 모여 “장이야!” 하는 외침

그 안에 담긴 사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

남 말 한다는 게

말이 돼?

당연한 게, 당연한 건 아니야

누구든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어…


테러를 일으킨 자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의란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

가장 큰 피해자는

정의를 갈망하는 힘없는 약자,

그들이 응징하려던 자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반복되는 아이러니 -


집에 돌아오니, 하숙집 주인이 한숨을 내쉰다.

“이번 달에 하숙비를 여러 명이 못 냈어. 걱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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