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와 실패를 넘는 공감
이삿짐 보냈어요. 한 달 정도 걸린대요.
한 달 남짓이면 아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온다. 기다림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자 마음에 파도가 거세진다.
‘잘한 결정 맞나?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애들한테는?...’
나는 그때 미국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요도 갖추지 못했다. 언제든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준비 없이 안일했다. 더구나 911 이후, 이민 관련해서 특히 까다로워졌다. 이제까지 대충 넘어가던 것들이 모조리 거부되거나, 보충 서류를 요구하며 마냥 기다리게 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생각으로…
아무 준비도 없이,
새로 회사를 세워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고 했을까?’
첫 단추부터 어긋나 엉켜버렸다. 무엇보다 소셜 번호(사회보장번호)가 없었다.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처럼, 이 번호는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요구됐다. 이게 없다는 건 존재에서 제외됐다는 뜻, 곧 ‘서류 없는 사람(undocumented person)’이었다.
아파트 얻는 것은 물론, 은행 계좌 개설, 휴대폰 개통, 자동차 구입에 이르기까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장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 아파트도 그가 자기 이름으로 구해줬다. 그는 내게 친절했고, 처음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 부인도 혼자인 내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줬다.
아파트는 전 사장 집 근처, LA 한인타운에서 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라크라센타(La Crescenta)에 얻었다. 광역 LA시를 품에 안은 산가브리엘 산맥 아래 동네로, 경치가 수려하고 학군이 좋아 한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바로 옆 동네인 라카냐다(La Cañada)는 고급 주택지로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비유됐다. 오죽하면, “엄마야 누나야, 라카냐다 살자”라는 부동산 광고가 공전의 히트를 쳤을 만큼, 그 동네 산다는 건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것으로 통했다.
아파트는 방 두 개 화장실 두 개, 약 25평 정도가 되어 우리 다섯 식구 살기에 넉넉했다. 무엇보다 좁은 하숙방에서 공간이 넓어지니, 자유로움에 잠시 시름을 잊었지만 내 모습은 묶인 줄이 좀 더 길어진 애완견에 다름없었다.
회사 이름은 한국에서 다녔던 회사 이름 그대로 했다. 회사 로고도 비슷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큰 회사와 관련 있어 보이는 게 신뢰를 얻는데 유리했다. 전 사장은 광고에 문외한이라 거의 내 의견을 따랐다.
“진 부사장이 알아서 해. 나야 아무것도 모르는데 뭘”
이런 식이었다. 간섭하지 않아서 편하긴 했지만, 책임감으로 버거웠다.
가족들이 오기 전까지 내 아파트가 본사였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 전까지 월급은 받지 않기로 했다. 흔쾌히 동의했지만, 돈에 대한 절박함은 내가 더 절실했다. 하루하루 통장 잔액은 가뭄에 마른 저수지처럼 빠져나갔고, 바닥이 드러날수록 내 마음도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며칠 뒤, 함께 하기로 한 지넬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언론학으로 유명한 대학 출신으로 꽤 규모 있는 중국계 광고회사에서 영어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서른 다섯 정도로 2학년, 4학년 남자아이를 둔 엄마였다. 최고급 주택지로 유명한 팔로스 버디스에서 살았다.
“안녕하세요? 저 지넬이에요.” 말이 어눌한 것이, 일상적인 회화 수준의 한국어만 하는 정도였다.
‘광고는 디테일한 커뮤니케이션 중요한데, 이런 어설픈 만남으로 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난 지 얼마 안 돼 서로에 대해 무지했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불현듯 일곱 살 무렵. 북적이는 시장통에서 엄마를 놓쳐 공포에 떨며 울던 때가 떠올랐다. 딱 그 심정이었다.
영어는 말투 자체가 단정적이다.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자칫 건방진 모습으로도 비친다. 그녀가 그랬다. 그녀는 Yes, No가 분명했다. 가끔, “No, That’s not right.”이런 말을 자주 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의견인 줄 알면서,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나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지니, 자존심은 높아지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정을 누른 채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 사장은 그녀가 소원을 해결해 줄 램프의 요정이길 바랐다.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였다.
근거 없는 긍정적인 생각 - 돈키호테의 무모함과 다름없었다.
지넬의 집은 내 아파트에서 약 40마일이 떨어져, 1시간 30분이 넘는 먼 거리였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면서 가정 주부라 당장 돈 안 되는 회사 일보다, 집안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출근하지 않으면, 일은 진척되지 않고 멈춰 섰다. 일주일에 두 번 하기로 한 미팅도 지넬의 사정에 따라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잦았다. 어쩌다 한 번씩 툭툭 던지는 아이디어는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기대는 서서히 실망에서 불만으로 이어졌다.
하루는 참다못해 “그 여자, 차라리 없는 게 낫겠어요.” 사장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치밀어 올라 참을 수 없었다는 게 이런 거였다.
그는 잠자코 나가서 담배를 태웠다. 방에 들어와서도 어색한 적막만 흘렀다. 잠시 후 “이제 퇴근할게. 좀 쉬라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불투명한 미래,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그 처연함이란... 한국이라면 술자리를 통해 쏟아내겠지만, 여긴 아무도 없었다.
회사는 내게는 반드시 해야 하는 간절함이었지만, 지넬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간절함의 차이에 따라 마음의 거리도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회의 중에, 자주 전화를 받았다. 양해는 구했지만 형식적이었다. 그때마다 회의는 중단됐고, 리듬도 끊겼다.
어느 날, 그녀가 미팅 시간이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다. 오늘도 그러려니 하며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30분쯤 지났을까 전화가 왔다. “Mr. 전, 저 이제 그만둬야 해요. 남편이 새로 회사를 시작했는데, 제가 매일 가야 해요. 집을 담보로 대출받았어요. 회사가 안 되면 우리 망해요.” 사뭇 진지했다. 그녀의 이런 비장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전화 한 통으로 사표를 냈다. 이것이 그녀의 관심의 크기였다. 함께 한다는 것은 공연과 같아서 인내와 수고가 필요조건이다. 우린 함께 공연하기에는 서로 몰랐고, 아무 준비도 없이 막연했다. 막이 오르기 전에 헤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건 상식이었다.
지넬이 그만둔 다음부터, 내가 회사를 주도했다. 회사 소개서를 만들어 나를 한국 최고의 광고기획 전문가로 포장했고, 사장은 IT 업계 경험이 풍부한 전문 경영인으로 소개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회사를 알렸다. 회사는 금세 눈에 띄게 활기가 돌았고, 업무에도 속도가 붙었다. 관심 보이는 광고주를 찾아가 우리 광고가 매출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킬 것이라 과장했다.
과장과 허풍이 일상이 되면, 진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어느새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아 점점 더 자극적이 된다. 이곳에서 광고하는 약은 거의 만병통치 불로초였고, 화장품은 젊음의 묘약이었다. 경쟁이 극심한 LA 광고 업계 현실이었다.
할 일이 있으니, 사장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우스개 소리도 가끔 하며, 골프도 하자고 한다. 여기저기에 전화도 많이 하며, “요새 많이 바빠, 시간이 통 없네…” 하며, 신나 했다. 몇몇 광고주가 일을 맡겼고, 최선을 다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무사히 들어올 수 있을까?...
5월 10일, 어버이날을 지내고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미국에 온다. 이제 한 달 여 남았다. 가족이 미국에 들어올 날이 다가올수록, 그리움에 비례해 염려와 걱정도 커졌다.
'엄마 혼자 다섯 살, 두 살, 8개월 된 아이 셋을 데리고, 관광 왔다고?'
믿어줄까?...
911 사태 후, 이민자에 대한 눈총이 따가워질 대로 따가워졌다. 사람들은 자기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계하거나 피하기 일쑤였다. 지나가다 욕설을 들으며 봉변을 당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일주일 정도 앞두니, 온 신경이 ‘무사히 입국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였다. 지나가다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점점 소망이 단순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 필요 없으니, 함께 있기만 해도 좋겠다.’로 바뀌었다. 진짜 소중함은 평범한 일상인데 너무 쉽게 잊으며 살았다.
염려, 걱정, 두려움을 속에서 내 본심을 발견한다. 그제서 소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5월 9일, 저녁 8시에 아내가 이제 막 비행기를 탄다고 전화가 왔다. 동생이 운전해서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줬다. 어머니도 함께 가셨다. 어머니는 막내까지 세 손주를 광명과 인천을 오가며 직접 키우셨다.
큰 아이가 태어난 날, 허겁지겁 뛰어 오시던 어머니.
아기 안는 것조차 서툴렀던 우리 대신, 큰 아이를 목욕시킬 때, 아기와 할머니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서로 초면, 사랑으로 눈빛이 경이로웠다.
엄마 몸에서 막 나온 아기를 배냇저고리로 꼭 싸매어, 세상과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했다. 옹알이를 하며 몸을 뒤집고, 일어서서 뒤뚱이며 첫걸음 뗄 때, 어머니는 손뼉을 치며 “우리 아가, 여기까지 오세요. 아이고, 우리 아기” 하시며, 온 마음을 쏟아 신기한 듯 보고 또 보셨다.
첫돌이 막 지난 아기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듣는 듯, 할머니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다가왔다. 아기의 탄생 이후, 아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우리 집에선 뉴스거리였다. 가끔 특종도 터졌다.
마음 한가득 채웠던, 그 사랑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내게 전해져 왔다. 나와 통화할 때, 어머니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계셨다. “잘 살아. 자주 연락하고…”
대한항공 017편이 도착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염려와 걱정은 폭풍우 같다. 때가 되면 지나간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날씨는 개었다.
멀리 한 두 사람 나타나더니 떼 지어 몰려나온다. 입구 제일 첫자리에서 고개를 쭉 빼고 쳐다보고 있었다. 저쪽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보인다. 큰 애가 나를 보자 달려온다, 꼭 안았다. 8개월 만이었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아니 왜 이렇게 새까매졌어요? 선블록 좀 바르고 다니지?”
“어… 알았어.”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아내는 이제 막 퇴근해서 집에 들어온 남편 대하듯 한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저만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