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니까 희망이 있다.
운항이 언제 재개될지 모르겠어요.
다음 달 광고도 중단하세요.
현 과장이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에선 직원들 말수도 적어지고 가끔 컴퓨터 자판 소리만 들릴 뿐 적막했다.
911 사태 후 한 달, 바깥세상은 제법 활기를 되찾아 가는데, 미국행 하늘 길은 꽉 막힌 채 그대로였다.
회사는 폭풍우에 고립된 외딴섬처럼 위태로웠다. 광고주들은 몸을 움츠렸고, 일은 거의 없었다. 사장은 아침에 잠깐 나타나서 온종일 안보였다.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나?’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도 불편했다. 차라리 안보는 것이 당장엔 편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조용한 사무실 정적을 깨기에 충분했다. 액정에 떠있는 이름을 보니, 사장 부인 지니였다. ‘나한테, 웬일이지?’
“여보세요?”
“이사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회사에 안 계시죠?”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망설임이 확연히 느껴졌다. 사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 네. 지금 외출 중이세요.”
“지금, 차 한잔 괜찮으세요?”
사장과 함께 식사는 몇 번 했지만, 단 둘이 만난 적은 없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웬일이지? 사장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지니는 LA 다운타운에서 원단 세일즈를 하고 있었다. 170cm 큰 키에 마른 체형으로 안경을 썼다. 40대 초반으로 사장보다 6살 연상이었다.
LA 다운타운은 자바 시장이라 불리며, 의류 업체들을 중심으로 생태계가 형성돼 있었다. 이곳은 줄잡아 5천 개 정도 업체에서 10만 명 이상 사람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LA 한인 사회의 젖줄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온 동대문파, 브라질에서 온 브라질파, 아르헨티나에서 온 알젠틴 파 이렇게 나뉘어 유태인을 몰아내고 당당히 주류로 올라섰다. 거기는 눈뜨고도 코가 베일 정도로 험하고 치열했다. 그녀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한 원단 세일즈로 10년 이상을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이었다.
커피숍은 한인 타운에서 좀 떨어져 아는 사람 마주칠 일이 없었다. 도착하니 그녀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 일 하시는 것은 좀 어떠세요? 가족들은 언제 오세요?”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갔다.
잠시 후, 망설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알고 계셨어요? ”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네? 뭘요?”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사장님과 오 부장 사이… 정말 모르세요?”
“네?”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오고 말문이 막혔다. ‘설마, 했는데…’
“오 부장은 사장님이 채팅을 통해 알게 됐어요. 나한테 몇 번 걸려서, 심하게 다퉜지요. 그런데,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어느 날 갑자기 데려온 거예요.”
예상치 못한 충격에 나는 오른손으로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녀의 다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입술이 꾹 깨물어졌다.
사장이 자리를 자주 비운 것은 오 부장과 밀회를 가졌던 거였다.
이어 그녀는 오 부장이 자기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내게 보여줬다. 화면에는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적나라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쓴웃음이 나오고, 오히려 정신이 돌아왔다.
지니는 엄 사장과 재혼이었다. 그녀는 사장이 영주권 때문에 자기와 결혼한 것이라 했다. 이 지경까지 왔지만 결혼은 유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좋을까요?” 오죽 의논할 사람이 없으면 내게 이런 말을 할까?...
“글쎄요… 두 사람을 떼어 놓는 게 먼저 아닐까요?”
“무진 애를 썼지요. 그런데 오 부장이 저한테 선수를 치고 이런 문자까지 보냈잖아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문자를 오 부장,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보내세요. 전화요금 고지서에서 수신자 번호를 확인하면 부모님 번호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오 부장은 회사에서 제공한 핸드폰을 사용했고, 그녀의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딸에게 전화했다. 지니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마음이 급했는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뒤,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회사에 오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며칠 뒤, 오 부장은 도망치듯 미국을 떠났다. 사장은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개의치 않고 전과 동일하게 행동했다. 다른 직원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니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서로 팔짱을 끼며 다정히 다녔다. 나를 집으로 초대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나는 아직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어느 날 사장은 회사가 어렵다며 월급을 깎으려 했다. “이사님, 잘 아시잖아요. 이해 좀 해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당연하다는 눈치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말문이 막혔다.
한쪽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겼고, 다른 쪽에선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일로 생각했다.
‘누가 옳은 거지?’ 혼란스러웠다.
이제 나와 가족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
외부 환경도 조만간 좋아질 것 같지 않고…
그만두려면 가족들 오기 전,
그만둬야겠지?
....
당연하지’
생각이 정리되자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잘 지내고 있죠?” 아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째를 낳은 지, 한 달. 아직 산후조리 중이었다.
“겪어보니, 사장이 영 아니야. 911 여파로 회사도 많이 어렵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아내는 대뜸, “지금 돈, 얼마나 있어요?”
“한 오천 달러정도 있는데, 왜?”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거기 골프 싸다면서요? 골프나 실컷 치면서 놀다 오세요”
아내의 말.
빛이 됐다.
곁에서 가만히
기다려주는 응원,
어둠은 벌써 저만치 -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신뢰,
괴물 같은 아우성도
잠잠해진다.
다음 날, 사표를 냈다.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휙 돌아서 자기 일을 한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현 과장에게도 회사를 그만뒀다고 전화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뭘 그런 일로 회사를 그만두느냐는 눈치다.
“이사님, 여긴 다 그래요. 그러려니 하셔야 편해요.” 그의 말이 ‘당신이 아직 세상 뜨거운 맛을 잘 모른다’는 빈정거림으로 들렸다.
불확실함 - 두려움의 원인이었다. 여기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지금까지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세상에 나오니 참 험했다.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짐 싸고 엘리베이터로 가는데 옆 사무실 전 사장이 있어 인사했다. 그는 나보다 10살 많았다. 대기업 전산 부장으로 있다가 6개월 전, E2 비자로 미국에 왔다. 그 역시 911 사태를 계기로 직원들 모두 내보내고 혼자였다.
“언제 가요? 가기 전에 골프 한번 합시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할까요?”
"그거 좋지." 그가 선뜻 승낙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한인타운에서 가까운 윌슨 골프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일 아침이라 골프장에 사람이 없어, 둘이 오붓하게 쳤다. 9번 홀 지날 때까지 한국에서 하던 일, 여기서 겪은 일 등 겉도는 이야기만 나눴다.
10번 홀에 들어서자, “진 이사, 왜 갑자기 그만두게 됐어?” 그는 내가 자기보다 10살 아래라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여기가 만만치 않네요. 엄 사장도 그렇고…”
전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걔한테 당했잖아. 완전 사기꾼이야. 얼마 전에 5만 달러 뜯겼어”
“........” 기가 막혔다.
“요새, 사업은 좀 어떠세요?”
“말도 아니지 뭐”
“광고회사 한번 해보세요. 돈도 별로 안 드는데” 별생각 없이 툭 던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정색을 한다.
“진 이사, 광고 전문가지? 내가 데리고 일하던 직원이 광고 쪽에서 일했는데, 아주 유능한 여자야. 여기서 태어난 2세고. 우리, 광고회사 같이 할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는데, 한번 해볼까?
막상 한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하니 마음 한편에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너무 창피해.’ 이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 한국의 가족과 친지, 전 직장 동료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합리적 판단보다 주변 시선을 더 의식한다. 미국 올 때도 그랬다.
“한번 해 볼까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볼게요”
“그래, 좋지”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나도 새로운 희망이 꿈틀거렸다.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911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 내가 미국에 온 지 두 달이 채 안되었다.
만남은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점차 의미를 덧입어 필연이라는 인과관계를 갖는다.
이들이 인생의 모양을 만들고 구성한다.
인생은 모른다.
절망의 수렁에서
불현듯
예상치 못한 희망이
'훅' 하고 나타난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기다리면 온다.
인생에서,
내 역할은 어디까지?
지나서 보니,
모자이크 조각이 맞춰져
멋진 그림이 생겼다.